[거짓말의 나라]<2>정치권은 표변… 인터넷은 ‘괴담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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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11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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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당 “FTA, 구국결단→을사늑약”… 한나라 “ISD, 주권침해→잘 몰랐다”돌고 도는 ‘한입 두말’ 정치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지난해 12월 8일 한나라당이 예산안을 단독으로 처리하자 “날치기 통과는 독재정권이 부활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라고 한나라당을 비난하며 소속 의원들을 끌고 거리로 나섰다.

당시 한나라당 안형환 대변인은 “국민은 거리에 앉아 농성하는 야당이 아닌 타협하고 협의하는 야당의 모습을 보기 원한다”며 연일 국회 복귀를 촉구했다.

2005년 겨울에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졌다. 다른 점은 장외투쟁의 주체가 바뀌었다는 것뿐이다.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는 여당이 사립학교법 개정안을 강행 처리하자 그해 12월 8일 장외투쟁을 선언했다.

여야가 바뀌면 말이 바뀌고 행동이 바뀐다. 똑같은 정치 현안을 놓고도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의 태도가 다르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비준동의안 처리를 둘러싼 여야의 공방이 단적인 사례다. 노무현 정부가 한 일 가운데 가장 잘한 일로 한미 FTA를 꼽았던 민주당 손학규 대표.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낸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이들에게 한미 FTA는 ‘구국의 결단’에서 4년 만에 나라를 팔아먹을 ‘을사늑약’으로 바뀌었다.

한나라당도 마찬가지다. 홍준표 대표는 현재 민주당 등 야권이 극렬 반대하고 있는 한미 FTA 비준안의 투자자·국가소송제도(ISD)를 두고 4년 전에는 “한국의 사법주권 전체를 미국에 바치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이제야 “당시에는 잘 몰랐다”며 어설픈 해명을 내놓고 있다.

여야간 공수(攻守)를 교대함에 따라 말이 달라진 사례는 셀 수 없이 많다. 당장 국회가 개원할 때면 여당은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을 여당이 맡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야당은 야당 몫이란다. 법사위는 본회의에 상정되는 법안의 ‘길목’이니 여야가 절대 양보할 수 없는 상임위다.

대통령의 각종 인사를 두고도 여당은 “대통령의 인사권을 존중해야 한다”고 말하고, 야당은 “코드 인사, 낙하산 인사”라고 비판한다. 당의 이름과 논평을 내는 대변인은 달라져도 논평 내용은 매 한 가지다.

이명박 대통령이 퇴임 후 거주할 사저에 역대 최대 예산이 들어간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한나라당은 머쓱해졌다. 홍 대표나 나경원 최고위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경남 김해시 봉화마을 사저를 ‘아방궁’이니 ‘노무현 타운’이니 하며 공격했기 때문이다. 결국 나 최고위원은 서울시장 선거운동 중 유감의 뜻을 나타냈다.

전문가들은 이런 정치인들의 ‘표변’이 ‘철학의 빈곤’에서 비롯됐다고 지적한다. 몇몇 실력자에게 공천을 받아 정치권으로 들어오는 구조 속에서는 애초 소신이나 신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실력자들의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따라 움직이다보니 여야가 바뀌면 ‘사고의 혼돈’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한 초선 의원은 “무한한 소신과 약간의 계산으로 정치권에서 성장하고 싶었는데 지금 남은 건 무한한 계산과 약간의 소신뿐”이라고 말했다.

여기에 미래의 비전은 제시하지 못한 채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는 ‘정치공학적 사고’가 더해지면 거짓말이나 말 바꾸기에 대한 도덕적 부끄러움조차 잊게 된다는 지적이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미국에선 정치인이 거짓말을 하거나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면 유권자들이 바로 외면한다”며 “우리나라 유권자들도 정치인들의 말을 검증하고 표로 심판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최우열 기자 dnsp@donga.com  
▼ 의료민영화 가정한 글 → 앞뒤 자르고 “맹장수술 900만원” ▼


‘촛불집회 당시의 사망설, 그 진실을 밝힙니다.’

4일 오후 포털사이트 다음 아고라 토론방에는 ‘쥐대가리’라는 필명의 누리꾼이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당시 한 여성이 전경들의 폭행으로 사망했다”는 글을 올렸다. 당시 10대 후반 여성이 사망했고 이 시신이 충북 청원군 대청호에서 발견됐지만 경찰이 이를 은폐했다는 내용이었다. 2008년 6월 광우병 촛불집회 때 처음 등장한 ‘시위 여대생 사망설’은 이 괴담을 처음 퍼뜨린 지방지 기자 최모 씨(51)가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은 뒤에도 여전히 사실처럼 온라인 공간을 떠돌고 있다.

○ 사라지지 않는 괴담


확인되지 않은 정보부터 전혀 없는 일을 진짜처럼 꾸며낸 거짓말까지, 2011년 대한민국 인터넷에는 각종 소문과 괴담이 떠돌고 있다. 의혹 제기나 한쪽의 주장이 대중에게 수시로 반복 노출되면서 사실처럼 받아들여지는 경우도 많다.

‘시위 여대생 사망설’이 없었던 일을 꾸며낸 ‘거짓말’이라면 최근 온라인상에 확산되고 있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관련된 괴담은 사실을 왜곡하거나 한쪽 입장에서만 재구성한 것들이다. 적지 않은 젊은층은 이들 괴담의 진위를 정밀하게 따져보지 않은 채 보편적이고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인다.

‘한미 FTA가 발효돼 의료민영화가 이뤄지면 맹장수술비로 900만 원을 내야 한다’는 괴담이 대표적이다. 이 괴담은 그동안 반FTA 진영에서 ‘의료민영화가 진행되면 현재의 건강보험제도가 무효화되기 때문에 의료비가 급등할 수 있다’는 주장을 업그레이드한 버전이지만 의료비 자체가 오를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지난달 29일 시사콘서트 ‘나는 꼼수다’에서 등장한 ‘이명박 대통령-에리카 김 불륜설’은 확인되지 않은 정보, 혹은 확인이 불가능한 말을 사실처럼 퍼뜨리는 방식에 해당한다. 패널 중 한 명인 주진우 시사in 기자는 에리카 김이 자신과의 전화통화에서 “(이 대통령과) 부적절한 관계였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이 내용은 ‘에리카 김과 이명박 대통령이 불륜 관계였으며 숨겨진 자식이 있다’는 루머로 번져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다.

○ SNS가 괴담 확산


최근에는 트위터 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괴담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 140자로 글을 압축하는 과정에서 사실 관계가 왜곡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에 리트윗을 통해 각종 설이 번져 나간다.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온 장문의 한미 FTA 반대 논리가 ‘한미 FTA 체결하면 맹장수술비 900만 원’ 식의 짧은 한두 문장으로 압축돼 전달되는 것이다. 한미 FTA에 관한 각종 괴담은 주로 유명 인터넷 카페와 SNS를 중심으로 퍼지고 있다. 카페 회원이 한미 FTA에 관한 질문을 올리면 카페에 올라온 글을 검색해 또 다른 회원이 댓글을 달고, 이 내용은 다시 트위터 등 SNS를 통해 해당 인물의 지인에게 전달되는 식이다.

인터넷을 통해 각종 괴담과 거짓말이 난무하는 현실에 대해 현택수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인터넷 카페나 SNS를 통해 퍼지는 루머는 평소 알던 사람들끼리 전달하는 것이기 때문에 훨씬 더 신뢰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사실을 믿는 게 아니라 정서에 와 닿는 것을 믿는다는 설명이다. 황상민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는 “한국 사회에서는 사실 여부를 판단할 때 출처나 근거를 따지기보다는 ‘누가 그랬다더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알고 있어’ 식의 대세추정 성향이 있다”고 말했다. 성영신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는 “공적영역에 대한 신뢰가 낮은 한국사회에서 안철수, 박원순, 김제동 씨 등이 지지를 얻는 이유는 사람들이 이들에게 마치 친구에게 하듯 사적인 신뢰를 보이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조동주 기자 djc@donga.com  
▼ 인터넷 괴담 막으려면 ▼


정부는 ‘인터넷 괴담’에 속수무책이다. 최근 대검찰청은 “유언비어나 괴담 등을 인터넷에 올리거나 유포하는 행위 자체는 처벌할 수 없다”고 밝혔다. 허위사실 유포가 명예훼손에 해당되기 전까지는 나서는 게 쉽지 않다는 얘기다.

2008년 정부와 한나라당도 탤런트 최진실 씨 자살 사건을 계기로 악성 댓글(악플)과 루머에 대해 ‘사이버 모욕죄’를 신설해 처벌하는 방안을 추진한 적이 있다. 하지만 야당과 시민단체의 반대로 일명 ‘최진실법’은 도입되지 못했다. 인터넷 여론에 대한 ‘재갈 물리기’가 될 수 있다는 우려였다.

새 제도 도입이나 처벌 강화 등의 단기적 처방도 필요하지만 누리꾼 스스로 성숙한 민주시민으로서 자정능력을 키울 수 있는 중·장기적인 대책 마련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많다. 선플달기국민운동본부 이사장인 민병철 건국대 국제학부 교수는 “쓰레기 줍기에 참여해본 이들은 쓰레기를 버리지 않는다”며 “누리꾼들은 자신이 한 일이 얼마나 파급력이 있는지를 모르는 경우가 많은 만큼 지속적인 캠페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박효종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는 “학교·평생 교육을 통해 정직의 가치가 우리 사회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정부가 투명한 정보 공개로 국민의 불신을 해소하는 데 더욱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홍수영 기자 gae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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