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러시아, 그루지야 사태 싸고 거친 설전

  • 동아일보
  • 입력 2008년 8월 15일 02시 56분



美 “지금은 1968년 아니다…철군하라”

러 “미국이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

유럽국가들 평화군 파견 등 논의… 개입 채비


“지금은 1968년(옛 소련군 탱크가 체코 민주화를 진압한 해)이 아니다.”(미국)

“미국이 위험한 게임을 하고 있다.”(러시아)

전쟁 중단에 합의한 그루지야 문제를 놓고 미국과 러시아가 거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전쟁을 관망했던 유럽연합(EU)과 독립국가연합(CIS) 국가들도 그루지야 평화정착 문제에 대해 한마디씩 거들고 있다.

▽러시아군 철수 공방=러시아와 그루지야가 프랑스의 평화중재안에 합의한 13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은 그루지야 영토에 남아 있던 러시아군의 즉각 철수를 촉구했다.

미국이 겨냥한 러시아군은 분쟁지역 남(南)오세티야와 압하지야 경계선을 넘어 그루지야 본토에 진격한 부대를 말한다. 그루지야 수도 트빌리시 외곽 도시, 압하지야 인근의 세나키 시와 포티 항구 등에는 14일까지 러시아 특수부대와 탱크가 주둔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교장관은 이날 “민간인을 위협할 수 있는 무기를 없애기 위해 러시아 부대가 그루지야에 남아 있다”고 말했다.

미국은 “러시아가 그루지야의 영토와 주권을 존중해야 한다”며 압박했다. 러시아군은 14일 남오세티야 남부 고리 시에서 일부 철수했으나 그루지야 군이 분쟁 지역에서 모두 철군할 때까지 병력을 남겨둘 방침이다.

▽미-러의 거친 설전=러시아가 “그루지야와 러시아 중 택일하라”고 요구한 데 대해 미국은 즉각 그루지야를 선택했다.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은 14일 워싱턴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지금은 1968년이 아니다”라며 옛 소련이 탱크로 체코 민주화를 진압했던 ‘프라하의 봄’ 사태를 떠올렸다. 라이스 장관은 그루지야 정부를 지원하는 외교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에 대해 라브로프 외교장관은 “미국이 그루지야를 편들 때부터 ‘위험한 게임’이라고 경고해 왔다”며 비난 강도를 높였다. 그는 “그루지야의 영토적 통일성이 제한될 수 있다”고 말했다고 인테르팍스통신이 전했다.

미-러 양국은 그루지야 전후 복구와 구호물자 수송을 놓고도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미국은 구호물자를 실은 C-17 수송기와 해군 함정을 그루지야에 보냈다.

러시아도 전쟁 발발 지역인 남오세티야 츠힌발리 인근에 공군과 육군 보급 부대를 수시로 투입하고 있다.

▽유럽과 CIS의 개입=유럽 외교장관들은 1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의를 열고 그루지야에 평화유지군(PKO)을 보내는 방안을 논의했다. 현재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에 주둔하는 PKO는 러시아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3일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를 통과하려면 사전에 우크라이나의 허가를 얻어야 한다고 발표했다. 라트비아 폴란드 등 동유럽 국가도 그루지야를 지지하고 나섰다. 이날까지 CIS 국가 중 러시아를 지지한 국가는 카자흐스탄뿐.

모스크바 안보 전문가 이반 사프란추크 씨는 “그루지야 전쟁이 미-러의 힘겨루기와 유럽의 개입을 불러 평화협정 체결에 이르기까지 험로가 예상된다”고 말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그루지야 사태 Q & A

Q. 사태발단 두 ‘인종 섬’은?

A. 남오세티야-압하지야 90년대부터 분리투쟁

Q. 러시아가 개입한 배경은?

A. 친서방 정부의 NATO 가입 시도 강력 반대


냉전 종식 이래 가장 심각한 서방 대 러시아 간의 대치 양상으로 치닫는 그루지야 사태의 배경을 일문일답식으로 알아본다. 공영라디오방송(NPR), 뉴욕타임스 등 미국 주요 언론과 러시아 측의 설명을 종합했다.

Q. 발단이 된 그루지야 내의 ‘인종 갈등’ 지역은 어떤 곳인가.

A. 그루지야에는 독립을 주장하는 ‘인종 섬(ethnic enclave)’ 지역이 2곳 있다. 발단이 된 남오세티야는 북쪽 러시아 국경 사이에, 또 다른 분쟁지역인 압하지야는 서쪽 흑해 해안선 북쪽에 있다. 이들은 흑해 동쪽의 캅카스 산맥 출신 민족이다. 소련은 러시아혁명 뒤 그루지야를 병합하면서 두 곳을 자치지역으로 만들었다. 1990년대 초 소련이 해체되면서 두 지역의 분리주의자들은 그루지야에 소속되는 걸 반대했다. 이들은 1990년대 초중반부터 분리주의 투쟁을 벌여왔고 사실상 독립된 지역처럼 생활해 왔다. 러시아는 그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해 왔고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군대를 주둔시켜 왔다.

Q. 러시아는 왜 그루지야 내 분리주의자를 지원하나.

A. 러시아는 오세티야인과 압하지야인도 러시아 국민이라 주장한다. 러시아 내 민족주의 그룹은 동유럽 위성국가들을 잃은 데 대해 감정이 좋지 않은 터에 그루지야에 친서방주의자인 미하일 사카슈빌리 대통령 정부가 들어선 걸 못마땅해했다. 특히 그루지야가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가입하려는 걸 강력히 반대해 왔다.

Q. 그루지야는 왜 두 지역을 그리 중시하나.

A. 남오세티야는 그루지야에 매우 중요한 자산인 석유·천연가스 파이프라인에 가깝다. 또 두 지역엔 그루지야 인종도 살고 있다. 휴먼라이트워치는 과거 압하지야 분리주의자들이 지역 내 그루지야인들을 상대로 학살, 강간 등을 자행했다고 보고한 바 있다. 결국 석유파이프라인뿐만 아니라 과거의 영향력 상실에 대한 러시아 내의 분노, 양국 지도부 사이의 적대감, 오랜 지역분쟁, 인종 갈등 등이 복합적으로 섞여 있다.

Q. 러시아가 그루지야를 점령할 가능성도 있는가.

A. 1968년 소련의 체코 침공 때와는 달리 현 러시아 정부는 영향력 확대를 위해 굳이 영토를 점령해야 한다고 느끼지는 않는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러시아는 그루지야를 순응시키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한 다른 옛 위성국가들에도 무력시위를 하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워싱턴=이기홍 특파원 sechepa@donga.com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viyonz@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