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전자업계는 지금 ‘짝짓기의 계절’

  • 입력 2007년 12월 27일 02시 5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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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치-마쓰시타-캐논 “LCD사업 포괄 제휴” 선언

샤프-도시바-파이오니아도 가전 공동개발 등 협력

‘비즈니스 세계에는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다.’

1980, 1990년대 세계시장을 호령했던 일본 전자업계의 최근 움직임에 딱 들어맞는 말이다.

일본빅터와 켄우드가 경영통합 방침을 발표한 7월 이후 한 달이 멀다 하고 대형 업체들 간의 자본제휴와 공동 생산 계획이 발표되고 있다.

그중에는 지금까지의 업계 상식을 뒤엎는 파격적인 조합도 적지 않다.

○ 무너지는 LCD 대 PDP 전선(戰線)

마쓰시타전기 캐논 히타치제작소 등 3사의 최고경영자(CEO)들은 크리스마스인 25일 도쿄(東京) 시내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액정표시장치(LCD) 사업에 포괄 제휴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마쓰시타가 히타치의 대형 LCD 자회사를, 캐논이 히타치의 중소형 LCD 자회사를 단계적으로 산하에 거둬들인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특히 마쓰시타는 이번 제휴를 통해 샤프가 건설하는 사카이(堺) 공장에 이어 세계에서 2번째로 큰 대형 LCD 공장을 지어 2009년부터 가동하기로 했다.

마쓰시타가 3000억 엔을 투자해 건설할 이 공장은 플라스마디스플레이패널(PDP) 생산에 주력하는 마쓰시타로서는 보기 드문 대규모 투자다.

이로써 ‘PDP의 마쓰시타, LCD의 샤프’라는 전자업계의 상식은 이제 통하지 않게 됐다.

샤프는 이미 선수를 친 상태다. PDP에 전력투구해 온 파이오니아에 14%를 출자해 디지털 가전을 공동개발하기로 9월 합의했다.

○ 발 빠른 도시바의 말 갈아타기

마쓰시타-캐논-히타치 연합이 출범하기 4일 전인 21일 가타야마 미키오(片山幹雄) 샤프 사장과 니시다 아쓰토시(西田厚聰) 도시바 사장은 기자회견을 갖고 “LCD TV 사업에서 손을 잡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내년부터 샤프는 32인치 이상 중대형 패널을, 도시바는 TV 화상 처리용 반도체를 공급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

니시다 사장은 이 제휴에 대해 “도깨비에 쇠방망이”(범에게 날개를 달아 주다라는 속담과 같은 뜻)라며 두 회사가 천생연분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전자업계의 연합구도대로라면 니시다 사장은 21일이 아닌 25일 기자회견장에 있어야 했다.

도시바는 마쓰시타 및 히타치와는 2005년 1월 IPS알파테크놀로지라는 대형 LCD 제조 자회사를 공동 설립해 운영하고 있고, 캐논과는 차세대 패널인 표면전계디스플레이(SED)를 공동 개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바와 샤프의 제휴는 최근 발 빠른 행보로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는 두 전자업체 간의 제휴라는 점에서도 비상한 주목을 받았다.

지난해 미국 웨스팅하우스를 인수해 세계를 놀라게 한 도시바는 낸드플래시메모리 반도체사업에서 삼성을 추월하겠다고 공언하는 등 자신감에 찬 발걸음을 계속해 왔다.

샤프는 일본 대기업으로는 파격적으로 40대를 CEO로 발탁한 이후 과감한 투자 계획을 잇달아 쏟아내 왔다.

○ 동기는 선택과 집중

일본 전자업체들 간 복잡한 합종연횡 드라마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는 키워드는 ‘선택과 집중’이다.

예컨대 도시바는 샤프와의 제휴를 계기로 당분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개발 등에서는 손을 떼고 주력사업인 반도체와 원자력발전소 건설 사업에 경영자원을 집중시킬 것으로 관측된다.

히타치는 제휴 파트너인 마쓰시타와 캐논에 주도권을 넘김으로써 LCD 사업의 적자 부담을 덜어내는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히타치는 TV와 함께 양대 적자사업으로 꼽히는 하드디스크드라이브(HDD) 자회사도 외국자본에 매각하기로 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 등은 일본 전자업계가 ‘제살 떼어내기’와 ‘적과의 동침’을 마다하지 않는 원인을 크게 두 가지로 보고 있다.

우선 가전제품이 디지털화하면서 아날로그 시대에 비해 연구개발(R&D) 비용이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인수합병(M&A) 등을 통한 유통업계의 대형화 추세다. 유통업체들이 강화된 협상력을 무기로 제조업체에 대한 가격인하 압력을 갈수록 강화하는 것.

이런 험난한 경영환경에서 경쟁력 없는 분야까지 홀로서기를 고집하면 만년 적자와 ‘후수(後手) 경영’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게 일본 전자업체의 공통된 인식이다.

도쿄=천광암 특파원 i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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