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지만 강한 대학]<13>스웨덴 IT대학

  • 입력 2006년 5월 4일 0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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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기술(IT)대의 학생들은 산학협력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해당 기업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IT대 학생들이 도서관에 마련된 공동토의실에서 산학협력 과제를 두고 논의를 하고 있다. 시스타=허진석 기자
정보기술(IT)대의 학생들은 산학협력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해당 기업으로 출근하는 경우가 많다. IT대 학생들이 도서관에 마련된 공동토의실에서 산학협력 과제를 두고 논의를 하고 있다. 시스타=허진석 기자
“1층은 강의실 2층엔 회사” 産學결합

《‘반도체 회로가 감광(感光)되지 않은 이유가 도대체 뭐야!’ 스웨덴 정보기술(IT)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한국인 유학생 김장용(32) 씨는 대학 내 반도체 공동기기실에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논문을 써야 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회로가 만들어지지 않았다. 기술적인 문제라 지도교수도 도움이 되지 못했다. 바로 그때 옆자리에서 같은 종류의 기기를 다루고 있던 반도체 및 통신장비회사 아크레오(Acreo)의 한 연구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연구원이 한동안 감광장치에 매달리더니 제대로 된 회로를 만들어 줬다. 한 달 내내 회로 문제로 골치를 앓던 김 씨는 ‘생큐’를 연발할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기업체와 같은 공간을 이용하면서 서로 돕는 ‘살아 있는 산학협력’이 IT대의 가장 큰 강점이다.》

스톡홀름에서 서북쪽으로 17km 떨어져 있는 66만 평 규모의 시스타(Kista) 사이언스 시티. ‘모바일 밸리’로 불리는 이곳은 스웨덴 경제의 심장으로 158개국 750여 개 기업이 입주해 있다. IT대는 시스타에서 연구 인력을 제공하는 중대한 역할을 맡고 있다.

이 학교는 2001년 설립됐다. 협업이 많은 시스타의 풍토를 닮기라도 하려는 듯 스웨덴왕립공대(KTH)와 스톡홀름대가 함께 만든 특이한 대학이다. 졸업생의 취업률은 100%다. 핀란드 오울루대와 함께 산학협력 대학으로서 세계적인 모델이 되고 있다.

IT대를 찾은 4월 중순은 부활절 연휴가 시작되는 때였지만 학생들은 공부를 계속하고 있었다. 학교는 ‘포룸’과 ‘일렉트룸’, ‘일렉트룸3’라는 건물 3개가 전부였다. 모두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다. 주변에는 스웨덴 국방과학연구소, 소니에릭손과 노키아연구소 및 이름을 알 수 없는 벤처기업 등 수백 개 기관이 둥지를 틀고 있다.

대학 건물 1층에 있는 식당에서 교수와 기업체 임원이 만나 아이디어를 나누고, 학생과 기업체 연구원들이 자연스럽게 연구를 주제로 대화를 한다.

마츠 브로르손 교수는 “최근 유명 대기업의 프로그래머 200여 명을 교육하는 과정이 새로 생겼는데, 이것도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IT대 교수와 해당 기업 임원이 우연히 만난 데서 시작됐다”며 “언제 어디서나 실용적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는 것이 IT대의 입지 조건”이라고 소개했다.

IT대는 스웨덴 시스타 지역의 민간연구소 및 벤처기업과 특별한 경계를 두지 않는다. A(포룸), B(일렉트룸), C(일렉트룸3) 등 3개의 건물을 제외한 다른 건물들은 모두 민간기업 건물. 대학 건물 안에도 층별로 벤처기업이 입주해 있을 정도로 대학과 기업의 구분이 없다. 자료 제공 구글어스

공식적인 산학협력의 ‘화학적 결합’은 더욱 공고하다. 산학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학생들은 기업의 직원이 된 것처럼 아예 그곳 연구소로 출근한다. 그리고 그 기업의 컴퓨터와 연구기자재를 마치 소속 연구원인 것처럼 사용한다. 삼성전자의 수원 디지털연구단지에 인근 대학원생이 출근하며 연구를 하는 셈이다.

스웨덴 국방과학연구소 관계자는 “우리 연구소에서도 IT대 대학원생들이 와 있다”며 “최신 연구 동향과 싼 인건비를 필요로 하는 외부기관과, 실무 경험을 쌓으려는 대학원생들의 수요가 맞아떨어지면서 ‘대학원생의 직원화’가 자연스럽게 진행되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회사 기밀 문제가 신경 쓰이지 않을까. 학생들은 “상용화 여부가 불분명한 기초기술을 연구하기 때문에 누가 기술을 가져가더라도 상용화하기는 힘들어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오히려 다양한 아이디어가 모일수록 더 튼튼한 기술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인식이 강하다.

세계 시장에서 경쟁하는 소니에릭손과 노키아가 IT대 인근에 연구소를 나란히 두고 있는 모습이 산학협력의 중요성을 보여 주는 듯했다. 한국 같으면 삼성과 LG의 연구원이 식사를 하면서 자신의 연구 분야를 주제로 대화를 나눌 수 있을까.

무선연구센터 등 20개 연구센터는 IT대 산하 기관이지만 단순히 1, 2개 기업과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다. 해당 프로젝트를 가장 효율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대학과 기업을 엮어 사실상 전국적인 프로젝트를 수행한다.

산학협력의 정신은 대학 교육 과정에도 배어 있다. 모든 수업은 현장 위주로 진행된다. 학위 마지막 단계에서 수행한 프로젝트는 민간업체로부터 평가를 받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시스템 테크놀로지를 전공하는 소피아 마르하우그(21) 씨는 “수업 중에 특정 레스토랑의 실제 재고관리 프로그램을 의뢰받아 이를 직접 설계하는 식으로 교육 받는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대학 내 산업위원회는 민간 기업의 연구개발 담당 임원이 참여해 산업체의 수요를 전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취업률에는 학생들의 창업도 포함되며 학교 측도 이를 적극 지원한다.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공간이 별도로 있을 뿐 아니라 변호사와 회계사 등이 이곳에서 갓 창업한 기업의 자문에 응하고 있다. 아이디어를 내면 학교가 심사를 하고 기술이 뒷받침되면 회계법인을 통해 창업자금까지 얻도록 해 준다.

미카엘 외스틀링 학장은 “학생들의 창업이 결국은 일자리 창출과 국가경쟁력으로 이어진다”고 강조했다.

왕립工大 - 스톡홀름大 손잡고 만든 ‘벤처대학’

■ IT대학은

IT대는 학생들의 창업을 적극 지원하고 있다. 대학 건물 안에 변호사와 회계사 사무실을 유치해 학생들이 기업 활동을 하는 데 불편이 없도록 하고 있다. IT대의 대표적 건물인 ‘포룸’. 시스타=허진석 기자

창업을 중시하는 이 대학은 사실 설립 자체가 ‘벤처’ 같다.

모체인 스웨덴왕립공대(KTH)는 1970년대 말 에릭손이 예비군훈련장으로 쓰이던 이곳으로 입주했을 때부터 인연을 맺었다. 이후 입주기업이 늘면서 대학원생들의 시스타 진출도 많아졌고 1990년대 초부터는 학부 강의도 이곳에서 진행됐다. 결국 2개 대학이 손잡고 IT대를 설립했다.

신입생은 각각 KTH와 스톡홀름대에서 뽑고 교수와 교직원도 각 대학에서 파견하는 형태다. 운영자금도 학생비율에 따라 각 대학에서 분담한다. 운영자금을 내는 비율은 70 대 30으로 KTH가 월등히 많다. 즉, 엄밀히 따지면 IT대는 KTH와 스톡홀름대 등의 시스타 캠퍼스의 집합체다.

IT대는 역시 KTH 주도로 만든 일렉트룸이라는 재단을 통해 시스타와 연결된다. 일렉트룸재단은 시스타 내 기업과 대학, 대기업과 중소기업, 자금과 연구 등을 연결하는 네트워크 역할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산학협력의 범위가 넓어지면서 IT대에 합류하는 대학이 늘고 있다. IT가 결합된 의료장비 개발을 위해 카롤린스키 의대가 합류했고, IT가 적용된 음악연구를 위해 왕립음대도 일부 학과를 옮길 계획이다.

이들 대학의 합류는 2015년까지 시스타를 세계 최고의 사이언스 시티로 만든다는 스톡홀름 시와 시스타 지역 위원회의 계획과 무관하지 않다. 이른바 ‘2015플랜’인 이 계획에 따르면 시스타는 통신과 인터넷, 미디어, 엔터테인먼트 복합단지로 개발된다.

이에 따라 IT대는 기업가 대학(Entrepreneurial University)으로 육성되고 민간 연구기관과의 공동연구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시스타=허진석 기자 james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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