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위크엔드]올가을 블랙이 돌아온다

최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2006∼2007 가을 겨울 프레타 포르테 패션쇼에서 선보인 다양한 블랙 패션. AP 연합뉴스

《#시내 지하철 안에 기묘한 분장을 한 키 크고 날씬한 여자들이 자주 눈에 띈다. (이들은 파리 곳곳에서 열리는 패션쇼 무대를 옮겨 다니는 무명 모델들이다.)

#지난해 재개장한 ‘그랑 팔레’에서 밤마다 신나는 음악과 함께 화려한 조명이 투명 천장 밖으로 새어 나온다.

#일간지들이 두툼한 패션쇼 특별판을 발간한다.

이런 현상은 파리에서 패션쇼 시즌이 돌아왔음을 알리는 신호탄이다. 패션에 민감한 파리지엔들은 이 시즌이 되면 TV로 생방송되는 패션쇼를 보기 위해 퇴근 후 귀가를 서두른다. 패션쇼 무대에는 초대받은 사람들만 갈 수 있으나 파리 프르미에 등 TV 채널은 전문가 설명을 곁들여 실제 현장에 있는 것보다 더 상세하게 패션을 전달한다.》

프랑스인들의 몸에 밴 패션 감각을 가리키는 ‘프렌치 시크(French Chic)’는 고급 패션의 본거지에서 새롭게 바뀌는 유행을 이처럼 가장 먼저 쉽게 접한다는 ‘홈그라운드’의 이점 덕분인 듯하다.

파리의 수많은 패션쇼 중 최근 막을 내린 2006∼2007 가을 겨울 여성복 프레타 포르테쇼는 많은 파리지엔의 기대를 모았다. 은행원 브리지트 파티(32) 씨는 “올겨울은 유난히 춥고 흐려서 우울했다. 패션쇼를 TV로 보면서 기분 전환을 하려 한다”며 귀가를 서둘렀다.

바이어 및 패션전문가들도 이번 쇼에 관심을 보였다. ‘패션사에 새로운 변화가 감지될 쇼’ 로 예견됐기 때문이다.

미국 패션지 보그의 안드레 리온 톨리 에디터는 AFP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시즌을 통해 옷 입는 방식이 느리게 진화하고 있음을 느낀다. 옷은 가벼워지고 있고 또 레이어링(겹쳐입기)의 새로운 방식이 포착되고 있다”고 말했다.

파리 프레타포르테 기간 중 열리는 수많은 쇼 중 가장 드라마틱하기로 소문난 디오르의 무대도 파리지엔들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이 브랜드의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쇼에서 프랑스혁명과 비운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티브로, 그리고 피로 물든 듯한 붉은 드레스를 보여줬던 디자이너 존 갈리아노가 또 어떤 충격과 즐거움을 줄지 궁금증을 자아냈기 때문이다.

필자도 기대를 안고 그랑 팔레에서 열린 디오르의 패션쇼를 찾았다. ‘고딕 시크’라고 이름 붙인 이 쇼에 나온 대부분의 의상은 블랙이었다. 몸에 달라붙는 검은 ‘스키니 팬츠’나 은색의 반짝이 장식이 새겨진 검은 선글라스 등 전반적으로 몸을 최대한 가리고 검은색으로 뒤덮은 의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전보다 더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디자인이다.

럭셔리 패션 컨설턴트 장 자크 피카르 씨는 파리에서 열린 100여 개의 패션쇼를 ‘에너지, 이성, 그 속에도 살아 있는 매력’으로 요약하면서 “파리는 매우 엄숙했다”고 표현했다. 디자이너 대부분이 몸을 완전히 가릴 정도로 보수적인 디자인과 어두운 색상의 의상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디오르쇼의 메인 색상인 블랙은 다른 디자이너들의 쇼에서도 일관되게 나타나면서 올겨울의 유행색을 규정지었다.

이렇게 되면 구치의 디자이너였던 톰 포드 씨가 다진 ‘포르노 시크(Porno Chic)’ 트렌드는 당분간 종말을 맞이하는 셈이다. 그는 2000년대 초까지 가슴과 허벅지를 거의 드러내는 디자인과 과감한 광고 이미지로 섹시 바람을 일으켰다.

랑방의 디자이너 알베르 엘바즈는 여러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요즘은 여성의 우아하고 겸손한 외양(look)과 태도(attitude)가 가장 아름다워 보이는 때”라고 말했다.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 씨는 샤넬과 자신의 브랜드 ‘칼 라거펠트’를 통해 긴 스커트와 어두운 색의 의상들을 대거 선보이면서 “매일 신문을 읽으면 (우울한 뉴스들 때문에) 분홍색 초록색 옷을 만들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지해진 패션’을 두고 영국의 패션 칼럼니스트 수지 멘키스 씨는 최근 논란이 된 마호메트 풍자만평 등 무슬림과 관련된 민감한 사건들을 거론하며 이로 인한 사회적 불안 때문에 차도르를 연상시킬 만큼 보수적인 옷들이 등장하게 됐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른바 무슬림 문화와의 갈등이 ‘패션의 이슬람화’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한편 파리 장식박물관의 올리비에 사이아르 패션큐레이터는 이 같은 현상을 보호막인 ‘코쿤’으로 숨으려는 현대인의 심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해석했다. 조류독감이나 전쟁 등 생존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범람하면서 현대인들은 몸을 많이 가리는 옷차림을 통해 ‘나만의 안식처’를 찾는다는 것이다.

일본인 디자이너 요지 야마모토 씨는 이번 컬렉션에서 십자가 패턴을 많이 사용했다. 디오르도 십자가 목걸이를 포인트로 사용했다. 디자이너들은 대부분 자신의 의상에 정치적 의도가 반영됐느냐는 질문에 “의도하지 않았지만 무의식적으로 작용한 것 같다”고 답한다. 패션쇼 무대 밖에서는 문명의 충돌이 빚어지지만 적어도 패션쇼 무대 위에서는 문명의 공존이 시도되는 듯하다.

파리=김현진 사외기자 kimhyunjin517@yaho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