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빈 前재무 “금리 0.25%P 때문에 국채발행 거부 이해못해”

  • 입력 2003년 11월 11일 18시 01분


“뼈아픈 경험이 주는 교훈을 사람들은 쉽게 잊어버린다. 한국의 경우가 그랬다.”

로버트 루빈 전 미국 재무장관은 18일 발간되는 자신의 회고록 ‘불확실한 세상에서(In an uncertain world)’를 통해 아시아 외환위기와 러시아 부도위기의 뒷얘기를 자세히 털어놓았다. 다음은 파이낸셜 타임스가 11일 게재한 회고록의 주요 내용.

▽이해할 수 없었던 한국=1999년 수렁에서 가까스로 빠져 나온 한국은 국제 자본시장에서 처음으로 채권을 발행할 기회를 맞았다. 기채(起債)만으로도 한국의 국가신인도 및 정책신뢰도는 급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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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한국 재정경제부 장관이 방미하기 직전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한국 금융기관들이 “이자율이 기대했던 것보다 0.25%포인트 높다”며 장관에게 계약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는 것이다.

나는 ‘농담이려니’ 생각했다. 불과 1년 전 국가부도 위기를 맞았던 나라가 고작 0.25%포인트 때문에 기회를 날린단 말인가. 이자를 더 얹어 주더라도 국제금융시장에 재진입하는 것이 백번 옳았다.

불행히도 그 얘기는 사실이었다. 한국의 장관은 “지나친 이자는 줄 수 없다”며 버텼다. 나는 오랜 시장 경험을 거론하며 “우선 채권을 발행하고 나면 이자율은 점차 내려갈 것”이라고 설득했다.

옥신각신하던 끝에 나는 화가 치밀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겠다. 당신 나라의 문제이지 내 나라 일이 아니다”고 외쳤다.

모니카 르윈스키 스캔들로 미 전역이 떠들썩했던 1998년 빌 클린턴 당시 대통령은 놀랄 만한 집중력으로 아시아 외환위기 및 러시아 부도위기를 처리했다.

▽원칙 무너지면 위험 더 크다=러시아 위기는 ‘설마 핵 강국 러시아를 부도내겠는가’라는 시장의 도덕적 해이 때문에 악화됐다. 과거에 근무했던 골드만삭스에 남아 있었다면 나도 이 도덕적 해이에 가세했을 것이다.

문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긴급 구제금융으로 러시아 개혁파를 지원할 수는 있겠지만 IMF가 요구 조건으로 내건 개혁조치를 러시아 의회가 승인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었다.

외교 라인은 “일단 보리스 옐친 등 개혁파를 무조건 지원하자”며 강하게 압박해 왔다. 그러나 나는 “원칙이 무너지면 위험이 훨씬 크다”며 버텼다. 결국 러시아가 루블화를 평가절하하고 모라토리엄(채무 지불유예)을 발표하면서 만연했던 도덕적 해이는 철퇴를 맞았다.

월가의 대형 헤지펀드인 LTCM이 파산위기에 빠진 것도 러시아 채권에 무리하게 투자했기 때문이다.

월가의 유력 은행들이 대부분 LTCM에 빌려준 돈을 떼일 위기에 처했다. 파산을 막기 위해 LTCM에 대한 대출 조건을 조정해야 했다. 정부가 나설 수는 없었다. 빌 맥더노 뉴욕 연방은행 총재가 나섰다. 그는 은행장들을 연방은행으로 불러 모은 뒤 빠져나오는 ‘개입 아닌 개입’으로 문제를 풀었다. 현실 경제는 번잡한 것이고 따라서 해결책도 복잡할 수밖에 없다.

박래정기자 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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