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난 “NO” 한마디에 美 ‘흠칫’…부시 일방외교 강력 비판

  • 입력 2003년 10월 9일 19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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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라크 치안 확보와 전후 재건에 필요한 병력과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 미국이 추진 중인 유엔 이라크 결의안이 좌초 위기를 맞았다. 이라크 문제를 거의 혼자서 처리해오던 미국의 일방주의도 암초에 부닥쳤다.

거칠 것 없어 보이던 미국의 결의안에 제동을 걸고 나선 핵심인물은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이다.

미국이 1일 ‘이라크에서 유엔의 역할을 다소 강화하고 가능한 한 신속히 이라크인들에게 주권을 이양한다’는 내용의 수정 결의안을 안전보장이사회에 상정할 때만 해도 결의안 통과는 무난해보였다. 콜린 파월 미 국무장관은 “23∼24일 이라크 지원 공여국 회의 전에 결의안이 통과되기를 바란다”며 날짜를 꼽을 정도였다.

그러나 7일 뉴욕타임스 등 주요 언론은 “미국의 결의안이 심각한 저항에 직면하자 미국은 결의안 철회냐, 표결 강행이냐를 놓고 고민하고 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이 같은 상황 급반전은 2일 아난 총장의 발언에서 촉발됐다. 아난 총장은 안보리가 새 이라크 결의안을 논의하기 직전 “미국의 새 결의안은 내가 권고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이라고 일격을 가했다. 안보리 회의에서도 결의안이 유엔의 역할을 형식적으로 규정했으며, 주권 이양 시기도 분명치 않다고 비판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의안에 어정쩡한 입장을 보였던 안보리 이사국들은 아난 총장의 발언을 계기로 반대 태도를 굳혔다. 이로써 표결에 들어간다 해도 전체 15표 중 결의안 통과에 필요한 9표를 얻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 것.

뉴욕타임스는 “아난 총장의 발언으로 미국의 결의안이 지니고 있던 희미한 동력마저 사라졌다”면서 “이는 미국 관리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아난 총장은 8일 미국 시민단체 대표들과 만나 “미국은 유엔의 틀 안에서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앞서 6일에는 “미국의 시민사회가 결정적인 순간에 일어나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며 미국 내 반대여론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아난 총장이 연일 쓴소리를 하는 것은 미국이 이라크전쟁을 벌이면서 유엔의 다자주의와 집단안보체제를 부정하는 태도를 보인 데 대한 반발이라는 해석이 많다. 미국의 일방주의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한 것도 한 원인이다.

아난 총장이 앞으로의 거취를 분명히 결정해 미국의 ‘구미’에 맞출 필요가 없다는 분석도 있다. 65세인 아난 총장은 지난달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3년 뒤 임기가 끝나면 고국 가나에 돌아가 농사를 짓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유엔본부=홍권희특파원konih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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