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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03년 8월 7일 16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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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바뀌어 요즘 하버드대와 서울대에 동시 합격한 학생이 서울대를 선택했다면 오히려 뉴스가 됐을 것이다. 비싼 유학비만 감당할 수 있다면 많은 학생들이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대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에 가기를 꿈꾼다.
박재만씨(20)는 서울대 공대에 한 학기 다니다 그만 두고 지난해 여름 미국 스탠퍼드대로 유학을 떠났다. 여름방학을 맞아 귀국한 박씨가 민족사관고 동기생으로 미국 대학에 진학한 육상현(19·예일대) 노혜진씨(20·윌리엄스대)와 만나 1년간의 미국 유학 생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세 사람 모두 해외 생활 경험 없이 한국에서 영어를 배웠다고 했다.
●첫 여름방학
육상현=혜진이 너 파마했구나.
노혜진=집 근처 미장원에서 했어. 미국에 있을 때 친구 따라서 미장원에 갔더니 머리 자르는 데 30달러나 하지 뭐야. 미장원에 가지 않으려고 길러서 질끈 묶고 다녔지.
박재만=남자 머리는 깎는 데 20달러야. 감겨주면 25달러이고. 대부분의 학생들은 바리캉으로 서로 밀어주지. 미국 애들이 짠돌이더라. 스탠퍼드 일대는 물가가 비싸거든. 내가 물건을 사려고 하면 친구들이 오리건주 같은 데서 사라고 말려. 캘리포니아주 소비세가 7.25%로 가장 높다면서 말이야.
노=여름방학 때 미국에 있으면서 인턴으로 일하려고 했어. 그런데 부모님이 보고 싶다고 하셔서 들어왔지. 미국에서 대학 다니는 친구들은 귀국하면 미국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많이 해. 난 중학교 3학년인 남동생에게 수학과 영어를 가르치고 있어.
박=나도 첫 여름방학이어서 들어왔어. 학생들에게 SAT와 에세이 쓰는 법을 지도하고 있어. 내년부터는 방학 때 미국에 남아 인턴으로 일할 생각이야. 미국 학생들은 방학을 일하는 기회로 여기더라. 방학 시작하기 3,4개월 전이면 원하는 회사에 지원서를 넣고 인터뷰하러 다니느라 바쁘지.
육=대학 1학년 때부터 이력서에 무엇을 써 넣을지 생각하면서 살아.
노=이력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경험 쌓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야. 방학 동안 회사에서 인턴으로 활동하겠다는 자료를 제출하면 학교에서도 기숙사와 숙식비를 제공해 줘.
박=한국에서는 인턴십이 크게 의미가 없어. 대부분 번역을 시키거든. 나중에 직장을 구할 때 도움이 될 만한 경력을 쌓을 기회를 주지 않아.
육=미국에서는 투자은행에서 인턴을 하면 취업에 유리하지. 경영 관련 전공자들은 3학년 때 투자은행에서 인턴을 하는 게 거의 정형화된 코스야.
박=인턴인데도 애널리스트로 시작하더라고. 돈도 많이 벌고.
●대학 공부
노=1학기 때 미적분학 물리 심리학개론 거시경제 4개 과목을 듣고 2학기 때 미시경제 사회심리학 통계학 19세기영문학 오페라 5개 과목을 들었어. 윌리엄스대에는 수업 시간은 적지만 숙제가 아주 많아. 처음엔 주말에 시간 내서 공부하면 되겠지 했는데 수업시간에 토론용 자료 준비하고 숙제하니까 1주일 내내 바쁘더라.
박=스탠퍼드대는 쿼터제인데 쿼터마다 아이험을 하나씩 들어야 돼. 아이험(IHUM)은 인문학 개론(Intro-ductory Humanities)을 줄여서 부르는 말이야. 첫 학기 아이험은 법과 정치 관련 이슈가 섞여 있는 시티즌십이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학기에는 그리스와 로마 희극(serious laughter)을 배웠어. 또 파워(PWR·Programs in Writings and Rhe-torics)라고 부르는 작문을 두 학기 들어야 해. 궁극적으로는 논문 쓰는 법을 배우는 과목이야. 세 번째 학기 땐 ‘수면과 꿈’이란 과목을 들었어.
육=수면과 꿈?
박=잠에 관한 모든 것을 배우는 과목이야. 수면 부족 현상이 일어나는 이유, 수면 부족으로 일어나는 사고들, 몽유병 등등.
육=난 1학기에 미시경제와 거시경제 각각 초급, 영어, 미적분학 4과목을 듣고 2학기에 미시와 거시경제 중급, 선형대수, 정치와 비즈니스에서의 전략적 사고(게임 이론), 마키아벨리 이후 서구 정치학, 음악 6개 과목을 들었어. 수업은 강의와 섹션으로 나뉘는데 강의는 교수가 하고 섹션은 조교들이 진행하는 토론 수업이야.
박=강의는 학생수가 300명이 될 수도 있지만 섹션은 10명 내외로 적지. 보통 강의가 1시간이면 섹션은 2시간이야. 섹션 시간에는 말을 많이 해야 돼. 읽어야 할 과제가 워낙 많아서 학생들은 시간을 전략적으로 활용하지. 이 과목 리딩은 포기하는 대신 다른 과목에 투자하는 식이야. 리딩을 소홀히 하는 과목은 대신 섹션 시간에 무조건 말을 많이 해서 커버하려고 하지.
노=나는 경제학이 재미있었어. 본 교재 외에 월스트리트 저널이나 뉴욕 타임스에 나오는 최근 기사들을 복사해서 최신 경제 현안을 따라잡도록 하는 게 좋았어. 예산안을 짜 보라든지 최저임금이 낮아 불만이 많은데 자신의 견해를 밝히라는 등의 숙제를 했지. 시험 때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어떠어떠한 경제 정책을 펴고 있는데 너는 이것이 옳다고 생각하는지 그래프를 그려 설명하라는 것이었어.
육=내가 들은 경제학 시간에도 숙제가 경제 정책을 직접 수립해 보라는 거였어. 5가지 경제 정책 목표가 있는데 이 중 하나는 나머지 목표와 상충된다, 이를 감안해 어떤 경제 정책을 쓸 것인지 쓰라는 거야.
박=평소에 숙제가 많으니까 기말고사 때는 공부할 것이 별로 없어. 서울대 다닐 땐 평소에 놀고 기말고사 때 밤샘했는데.
노=시험보다 숙제 비중이 높아. 숙제를 제출하기 전 학교에서는 특별 시간을 줘. 목요일이 숙제 제출일이면 화요일과 수요일 밤 20명씩 조를 짜서 조교들의 도움을 받으며 숙제를 마무리하도록 했지. 윌리엄스대는 학부 과정밖에 없어서 3, 4학년 선배들이 조교 역할을 했어.
육=숙제 중에서 시험문제가 나오니까 나중에 시험 볼 때는 편하더라. 처음엔 혼자 공부하다 나중에는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함께 공부했어. 아무래도 피부색에 따라 그룹이 짜여지는데 나는 한국이나 중국 친구들과 함께 했어. 교수들도 팀을 짜서 공부할 것을 권하는 편이야. 협동심을 키워주려는 의도인가 봐.
●미국 대학이 좋은 몇가지 이유
노=대학 입학 때도 그렇고 미국 사회에서는 추천서가 중요해. 추천서는 나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부터 받는 것이 좋지. 나는 추천서 관리하느라 일주일에 한번씩 지도교수를 찾아가.
박=서울대 다닐 때 지도교수를 본 적이 한번도 없어. 자퇴하려면 지도교수의 사인이 있어야 한다기에 갔더니 조교가 도장을 찍어주더라. 스탠퍼드대는 지도교수를 어드바이저라고 해서 2주에 1번씩 면담하고 가끔 바비큐 파티에도 초대해주지. 학생들을 상대로 어드바이저가 도움이 됐느냐, 추천서 써주어 도움이 됐던 어드바이저가 누구인가 등을 평가하도록 하기 때문에 교수들이 학생들에게 잘해주나 봐.
노=나는 경제를 전공하고 싶어서 경제학 교수님도 자주 찾아 뵙는 편이야. 과자 먹으면서 이것저것 질문도 하고. 나중에 추천서 부탁할 때도 좋을 것 같아서.
박=교수들은 학생과의 면담 시간에 찾아오는 걸 고맙게 여겨. 수업 시간에도 제발 자주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지.
육=가장 당황스러울 때가 성 문제에 부닥쳤을 때야. 학기 초에 룸메이트가 정색을 하고 말하더라고. 나는 무슨 무슨 요일 무슨 시간엔 섹스를 해야 하니 들어오지 말라고 말야. 중미에서 온 학생이 있었는데 성에 관한 책만 보는 아이였어. 여학생들이 섹스 후 문제가 생겨 상담을 청하면 ‘무슨 책 몇 페이지를 참고하라’고 조언해 줄 정도였지.
박=나는 미국 애들이 개인적인 시간과 사회적 시간을 명확히 구분하는 것을 보고 당황했어. 친구들끼리 모여 분위기 좋게 즐기고 있는데도 개인적인 약속이 있다며 벌떡 일어나 나가더라고. 우리 같으면 분위기 깬다고 핀잔을 주었을 텐데.
노=다양한 생각을 가진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는 게 좋아. 나와 의견이 다르다고 무시하지도 않고 의견이 충돌해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열린 문화가 좋아.
박=리더들은 모든 가치관을 포용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들었어. 경험의 폭이 사고의 폭을 결정하는데 여기 와서 다양한 사람들을 보고 경험할 수 있으니 생각도 깊어지겠지.
육=평소 독립적인 생활을 할 줄 알았더라면 적응하는 데 덜 힘들었을 거야.
노=시행착오 겪으며 사는 것도 재미있잖아.
정리=이진영기자 eco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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