덩은 후계자를 앞에 내세우고 자신은 ‘수렴청정’하는 방식으로 개혁개방을 이끌었다.
첫 후계자는 후야오방(胡耀邦). 후는 11기3중전회에서 화궈펑이 주장한 “마오쩌둥(毛澤東)의 결정과 지시는 모두 옳다”는 범시론(凡是論)을 격파, 마오의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제도를 비판했다. 그러나 후는 민주화를 갈망하는 전국적인 학생시위에 미온적으로 대처해 87년 실각했다.
이어 자오쯔양(趙紫陽)이 개혁개방의 조타수를 맡았다. 80년 총리에 이어 87년 총서기가 된 그는 정부가격고시제 철폐 등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그도 89년 톈안(天安)문사태 때 군동원과 계엄선포를 반대해 실각된 뒤 가택연금상태에 있다.
덩은 두 후계자의 급진적 개혁추진에 따른 민주화 시위와 보수파의 반발이 거세자 장쩌민(江澤民)상하이시서기를 당총서기로 발탁했다. 장은 절묘한 조정력으로 개혁파와 보수파를 아우르며 덩이 지난해 사망한 뒤로도 그의 노선을 꽃피우고 있다.
〈베이징〓황의봉특파원〉heb86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