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일본에서는 보수계 매스컴을 통해 「자유주의 사관(史觀)」이라는 말이 하루가 멀다하고 등장하고 있다. 언뜻 듣기에는 서방의 민주주의 사상과 연관된 것 같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과거 군국주의와 침략전쟁, 식민지배를 포함해 일본 역사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국제적 진출을 적극화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 교과서 수정 추진 ▼
일부 대학교수와 수필가 만화가 등 저명인사들의 주도로 작년말 결성된 「새로운 교과서를 만드는 회」라는 모임은 이같은 경향을 잘 보여준다. 이들은 「현행 교과서는 과거사를 부정적으로만 서술, 일본인을 위해 쓰여졌다고 보기 어렵다」며 「자신감 회복」을 촉구하고 있다.
「자유주의 사관」을 바탕으로 한 「신 국가주의」의 기승은 일본사회의 보수우경화 목소리가 갈수록 커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들이 아직 일본 사회의 주류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지만 점차 우려할 만한 수준으로 힘을 얻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침략전쟁의 부끄러운 역사를 지닌 일본 지식인 사회에서 8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최소한 과거사 정당화와 재군비주장은 일종의 「금기」로 여겨졌다. 그러나 90년대 들면서 과거 행동을 정당화하려는 움직임이 거세지고 있다』 릿쿄(立敎)대학 李鍾元(이종원·국제정치학) 교수의 지적이다.
보수계 지식인과 매스컴이 내놓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91년의 걸프전. 「국제사회 공헌」이라는 명분에 편승한 우경화 현상은 경제대국화에 따른 자신감 회복과 국제화의 산물인 「정체성(正體性) 위기」를 이용, 우익단체뿐만 아니라 적지 않은 일반인들로부터 공감을 얻기 시작했다.
▼ 사죄하는 모습 없어 ▼
산케이신문이 연재하고 있는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라는 시리즈를 비롯, 보수계 신문 잡지가 봇물처럼 쏟아내는 과거사 재평가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눈에 띄게 늘어나고 있다. 서점 진열대에 비치된 비슷한 내용의 서적들도 하루가 다르게 증가하는 추세다. 교과서를 발행한 출판사가 우익단체로부터 협박을 받거나 학부모들이 교과서 개정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하는 현상도 생겨났다.
독일지식계층이 나치의 침략전쟁과 만행을 기회있을 때마다 피해국들에 진심으로 사과하는 모습과는 달리 일본 지도층은 물론 일반사회에서도 그런 자세는 잘 눈에 띄지 않는다.
전쟁포기를 규정한 현행 평화헌법을 「미국에 의한 노예헌법」이라며 개헌을 요구하는 움직임도 주목할만 하다. 보수계 정치인과 지식인, 매스컴이 합동으로 대국민 설득에 총력을 기울이는 양상이다.
자민당 헌법조사회가 이달초 실시한 국민여론조사의 개헌 찬성률은 75.9%. 작년 3월 국민여론조사(47%), 작년 8월 지식인 여론조사(57%), 지난 3월 국회의원 여론조사(60%) 등 갈수록 개헌에 공감하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다. 물론 개헌을 지지한다고 바로 전쟁포기조항 개정이나 군사대국화에 찬동한다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사회 변화의 한 흐름임에는 틀림없다.
지방자치단체가 공금으로 야스쿠니(靖國)신사에 헌금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대법원 판결에 대한 반발이나 끊임없는 상징조작을 통해 왕실에 대한 존경심을 높여가는 작업도 우경화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 획일주의 주목해야 ▼
「자유주의 사관」을 부르짖는 지식인이나 정치인과 이를 이를 받아들이는 일반인, 특히 젊은층의 성향에 미묘한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개인주의가 강한 젊은층의 「신 국가주의적 사고」를 「천황(일왕)을 위해 기꺼이 전쟁에 나가는」 전전형(戰前型) 군국주의로 바로 동일시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정서적 차원에 머물고 있는 젊은 층의 심리가 앞으로 상황변화에 따라 군국주의적 지향성으로 쏠릴 가능성까지 배제하기는 어렵다. 특히 일본사회 분위기가 다수 의견에 동조하는 획일주의가 강하다는 점이 최근 일본 사회에서 전개되는 흐름을 우려섞인 눈으로 보게 한다.
〈동경〓권순활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