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장엽 망명/黃의 북경생활]한국신문 안보고 독서 소일

  • 입력 1997년 2월 14일 20시 10분


지난 12일 오전 10시5분경(이하 현지시간) 2층 집무실에서 모니터를 통해 영사부 건물 정문을 주시하던 南相旭(남상욱)총영사의 눈에 색다른 장면이 들어왔다. 평소같으면 국제결혼증명을 떼려는 조선족 남녀들이 주로 드나들던 곳에 웬 낯선 노인이 경비중이던 중국공안원에 의해 출입이 제지되는 것이 목격됐기 때문이다. 점잖게 보이는 노인을 보는 순간 남총영사는 이날 아침 전화예고를 한 문제의 인물임을 직감하고 지체없이 1층으로 뛰어내려갔다. 세계를 놀라게 한 黃長燁(황장엽)의 망명요청이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날 오전 8시경 북한대사관을 떠난 황은 백화점 등을 들르면서 타고온 승용차를 따돌리고 택시편으로 영사부건물 2백m 못미친 지점에서 하차, 정문까지 걸어왔다. 남총영사에 의해 2층으로 안내된 황은 수행원 金德弘(김덕홍)과 자신의 한국행 의사를 밝혔고 이 사실은 즉각 鄭鍾旭(정종욱)대사에게 보고됐다. 황은 영사관에서 정대사등 주중(駐中)한국대사관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망명요청과 관련한 심경을 털어놓았다. 『조선의 주체사상은 왜곡되고 변질돼 완전히 실패했다』 『인민들의 비참한 현실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다. 내 한몸 죽더라도 진실을 알리고 싶다』 『김정일의 스승인 나의 책임이 크다. 크게 후회스럽다』는 등 북한의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자책감을 느끼고 있음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또 『서울에 못가면 이곳에서 죽어나가겠다』는 비장한 각오를 털어놓기도 했다. 황을 만나본 관계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그가 매우 점잖았으며 망명자답지 않게 논리정연하고도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의 의사를 드러내는 자세에서 전형적인 인텔리의 면모를 보였다고 전했다. 우리측 관계자들이 황을 부르는 공식호칭은 「황선생」. 「황선생」은 영사부 관내에서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평소 3시간 내지 3시간반 정도 수면을 취하는 습성대로 이곳에서도 4시간 이상은 자지 않고 있다는 것. 영사부건물 2층의 작은 방 하나가 그의 숙소다. 대사관 관계자들은 그가 매우 정상적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망명요청 당일 영사관측이 사온 도시락을 다 비웠고 이튿날부터는 한국식당에서 주문해온 한식을 주로 먹고 있다. 또 밤에는 햄버거도 간식으로 들고 있다. 담배는 원래부터 하지 않는 데다 술도 찾지 않고 있는 등 절제된 생활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것. 특별한 운동은 하고 있지 못하나 전체적으로 건강상태가 양호하다는 평가다. 영사관측은 황의 영사부건물 체류가 장기화될 것에 대비, 이미 모든 준비를 갖추어 놓고 있다. 건물 2층의 사무실지역내에 작은 방 하나를 배정받아 야전침대에서 수면을 취하고 있다. 김덕홍 역시 바로 옆에 별도의 방을 배정받았다. 대사관측은 12일 오후 인근 남도(藍島)백화점에서 새 이불을 구입해왔고 옷가지도 충분히 반입한 상태다. 황은 주로 상하의 운동복을 입고 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황 역시 사태가 장기전으로 흘러갈 가능성에 대비하고 있다는 소식이다. 아직 착수는 하지 않았으나 모종의 집필작업에 들어갈 뜻을 관계자들에게 밝혔다고 한다. 지식인답게 책을 읽고 쓰는 것이 유일한 소일거리. 일본서적을 읽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말이다. 황은 또 의외로 한국신문을 요구하지 않아 자신을 둘러싼 소용돌이에는 무관심하다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황이 북한정권의 핵심중 하나라는 점에서 대단한 정보보따리를 풀 것이라는 일반의 추측과는 달리 아직은 이렇다할 고급정보를 털어놓고 있지는 않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나이와 경력등을 감안, 우리측 관계자들이 예우를 해주고 있는 데다 본인 역시 말을 아끼고 있기 때문이다. 황은 자신의 망명이 주체사상의 실현이 실패한 데 따른 고뇌의 결과라는 등 논리적인 설명은 막힘이 없다는 것이다. 한번 한 얘기는 결코 중언부언하지 않을 정도로 논리적이라는 것. 그러나 북한의 체제관련 기밀사항이나 김정일에 대한 비난 등은 자제하고 있어 전체적으로 말을 삼간다는 평을 듣고 있다. 영사부 건물내에는 현재 상당수의 우리측 관계자들이 황일행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이중에는 단순한 뒷바라지에만 동원된 인원이 10명 이상이다. 현재까지는 영사부건물내의 화장실에서 세수와 목욕 등을 하고 외부에서 식사를 시켜다 먹고 있으나 이같은 상황이 오래가면 무언가 별도의 조치가 필요하다는 판단을 우리측은 하고 있다. 중국 공안당국은 영사부건물의 쓰레기통까지 검사하고 있고 북한측의 저격가능성까지 거론되고 있는 실정이어서 황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인 셈이다. 〈북경〓황의봉특파원·공종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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