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재기자의 무비홀릭]영화속 헌신적 사랑에 대한 …

  • 입력 2009년 4월 14일 03시 01분


영화속 헌신적 사랑에 대한

‘따스한’-‘냉철한’씨의 논쟁

《‘아, 나도 저런 사랑 한번 해봤으면….’ 영화 속 사랑을 보면서 우린 이런 상상을 한다. 저런 불같은 사랑, 지독한 사랑, 지고지순한 사랑이라면 목숨과도 맞바꾸겠다는 낭만적(혹은 철없는) 상상도 해본다. 최근 개봉된 영화 중엔 특히나 헌신적인 사랑을 담은 내용이 많아, 그렇잖아도 봄을 맞아 싱숭생숭한 우리의 마음을 부채질한다. 영화 속 헌신적 사랑, 어떻게 볼 것인가. 최신 개봉작 네 편에 등장하는 헌신적 사랑을 두고 따스한 씨와 냉철한 씨가 논쟁을 벌였다. 매사를 긍정적이고 진지하게 보고 느끼는 따스한 씨와 매사를 비딱하고 냉소적으로 받아들이는 냉철한 씨. 영화 속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자는 두 사람 중 과연 누구란 말인가.》

누군 따뜻하게, 누군 삐딱하게

사랑 본질 꿰뚫는 ‘극과 극’ 시선

따스한 씨=아, ‘워낭소리’를 보면서 사랑은 단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았네. 이 영화는 인간과 소가 진정한 교감을 통해 마음을 나눌 수 있음을 보여줬지. 냉철한 씨=안타깝습니다. 초딩(초등학생) 수준의 애정관을 갖고 계시군요. 전 ‘워낭소리’를 보면서 그 유명한 일본 변태 멜로영화 ‘완전한 사육’을 떠올렸습니다.

따스한 씨=오잉? 그게 무슨 소리요.

냉철한 씨=‘완전한 사육’은 한 여자를 남몰래 짝사랑해온 남자가 그녀를 납치해 감금한 뒤 그녀가 자신을 진정 사랑해줄 때까지 버틴다는 내용입니다. 처음엔 탈출의 기회를 엿보던 여성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의욕을 잃고 나중엔 남자를 진짜로 사랑하게 되지요. 탈출할 생각 자체를 아예 하지 않는 겁니다. 유식한 말로 이를 스톡홀름 신드롬(인질이 인질범에게 심리적으로 동화되는 현상)이라고도 하지요.

따스한 씨=그럼 ‘워낭소리’의 소가 ‘완전한 사육’의 여성과 같은 꼴이란 얘기요?

냉철한 씨=진정한 사랑엔 전제조건이 있습니다. 바로 자유로운 선택이지요. ‘워낭소리’의 소는 할아버지를 선택한 게 아니었습니다. 그러니 그건 자유시장경쟁을 거쳐 형성된 진짜 사랑이라고 볼 수 없지요.

따스한 씨=아, 절망적이군요. 할아버지는 매일 새벽이면 천근만근의 몸을 일으켜서 소에게 쇠죽을 쑤어 먹입니다. 이런 할아버지의 사랑을 먹고 살아온 소는 평균수명(15세)을 훨씬 넘어 마흔 살까지 천수를 누리지요. 사랑은 이렇게 위대한 생명력을 선물해줍니다.

냉철한 씨=소가 오래 산 건 할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매일 규칙적인 생활과 운동(논밭 갈기)을 하면서 할아버지가 만들어준 유기농 음식을 먹었기 때문으로 봐야 합니다. 따스한 씨=당신은 사랑의 힘을 도무지 믿질 않는군요. ‘더 리더-책 읽어주는 남자’란 영화는 혹시 보았나요? 이 영화 속 사랑의 본질도 역시 ‘주인-노예’의 관계로 보나요? 천만에요. 이 영화는 사랑의 본질에 대해 ‘서로의 결핍을 채워주는 나눔과 보완’이라고 말해주고 있어요. 30대 여인 ‘한나’는 인생의 경험이 풍부하지만 글을 몰라요. 반면 10대 소년 ‘마이클’은 글을 알지만 정작 인생 경험은 없지요. 소년은 여성에게 소설을 읽어주고, 여성은 소년에게 성(性)이란 경험을 알려줍니다. 독서와 섹스를 통해 두 사람은 스무 살에 가까운 나이 차를 극복하고 진정한 교감을 하게 되지요.

냉철한 씨=그것 역시 진짜 사랑이 아닙니다. ‘무식한 연상녀와 똑똑한 연하남’이란 이 영화 속 설정은 ‘귀족 가문의 연상녀와 뇌는 없고 몸만 건강한 하인 집 연하남’이라는 기존 에로영화들의 설정을 살짝 비튼 것에 불과합니다. ‘더 리더’ 속 관계는 사랑이라기보단 일종의 갑을관계 혹은 권력관계로 보아야 마땅합니다. 소년이 어렸을 땐 연상녀가 자기 마음대로 관계를 청산하고 어디론가 떠나버리잖아요? 하지만 훗날 한나가 전범(戰犯) 혐의로 감옥에 갇히고 난 뒤엔 어떤가요? 한나는 마이클과 재회하길 수십 년간 감옥 속에서 애원하지만, 변호사로 성장한 마이클이 이번엔 그녀를 외면합니다. 인간은 사랑이란 이름의 권력관계를 즐길 뿐이에요.

따스한 씨=아, 당신과는 말이 통하질 않네요. 냉철한 씨=저는 박찬욱 감독의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제목을 패러디한 한 삼류 에로영화를 최근 케이블방송에서 보고는 그만 넋을 잃고 말았습니다. 제목은 ‘살이 보이지만 괜찮아’였지요. 아, 이 영화, 사랑의 본질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영화였어요.

따스한 씨=당신이 생각하는 사랑의 본질이란 게 도대체 뭔가요?

냉철한 씨=사랑은 없다는 게 사랑의 본질이지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따스한 씨와 냉철한 씨의 논쟁은 ‘무비홀릭’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과연 따스한 씨는 냉철한 씨의 비뚤어진 애정관을 바로잡을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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