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ere&Now]코스프레 콘테스트, "만화속 주인공 저하고 똑같죠"

  • 입력 2000년 10월 31일 19시 04분


“어, ‘좀비 헌터’의 도시오 잖아?”

“저기 예지몽도 있다, 예지몽!”

토요일 오후 4시. 서울 지하철 2호선 강남역. 만화책과 게임기에서 방금 빠져나온 듯한 캐릭터 복장을 한 130여명이 지하철을 타고 어디론가 이동했다. 지하철에 함께 탄 어른들이 ‘도대체 쟤들은 뭐야?’하는 시선으로 쳐다보지만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인터넷업체인 캐릭터랩이 주최한 ‘코스프레 콘테스트’가 열리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 캐릭터들이 나타나자 행사장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10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이들을 에워싸고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사쿠라’의 ‘사쿠라’, ‘봉신연의’의 ‘태공망’, ‘X클램프’의 ‘예지몽’ 등이 코스프레마다 즐겨 등장하는 인기 캐릭터. 이날 행사장에서도 이들에게 카메라가 가장 많이 집중됐다.

사쿠라와 사쿠라의 친구인 토모요로 각각 분장하고 참가한 박모양(16·중3)과 최모양(17·고2)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코스프레를 하다보면 같은 만화를 소재로 한 사람끼리는 금방 친해진다”며 나란히 서서 또래 청소년들에게 만화속 장면 같은 포즈를 취해줬다. 밀레니엄광장에서 사진촬영 등을 한 후 코엑스몰 실내에서 열린 콘테스트에서는 ‘포즈상’ 등 9개 부문에 걸쳐 행사가 열렸다.

만화나 게임 캐릭터와 똑같은 복장을 하고 그들의 행동이나 모습을 흉내내는 ‘코스프레’(코스튬 플레이·costume play 의 준말)는 만화와 게임 캐릭터를 친구삼아 자라난 ‘캐릭터 세대’들의 대표적인 마니아 문화다. 코스프레는 미국 할로윈축제가 일본으로 건너가 캐릭터축제로 변형된 것이다. 코스프레 콘테스트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화나 게임의 캐릭터를 얼마나 똑같이 재현했는지 여부.

참가자들의 의상은 대부분 남대문, 동대문 등을 돌아다니며 천을 끊고 소품을 사서 직접 만든다. 그래서인지 참가자들의 의상을 자세히 뜯어보면 삐뚤삐뚤 미숙한 바느질 솜씨와 군데군데 옷핀으로 엉성하게 여며놓은 부분도 눈에 띈다.

수원에서 온 이미진양(16)은 “예지몽 머리를 만들기 위해 머리에 철사를 넣고 신문지로 둘둘 감은 다음 다시 실로 덮어 흰 가발과 똑같은 색깔로 염색했다”며 “옷이랑 머리를 만드는데는 일주일 걸렸고 재료비 등으로 한 10만원쯤 들었다”고 말했다.

코스프레가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으면서 홍익대 앞과 동대문 등에는 아예 코스프레 옷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상점까지 생겨났다. 공식적인 규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청소년들이 주로 참가하다보니 △골반과 가슴 노출 금지 △기모노 등 노골적인 왜색금지 등 나름대로 ‘불문률’도 있다.

국내 각종 만화 동아리에서 자체적으로 즐겨왔던 코스프레가 공식 행사로 자리잡은 것은 97년 9월. 전국만화동아리연합회(ACA)가 당시 서울의 거평프레야 이벤트홀에서 만화축제의 부대행사로 마련하면서부터. 당시 20여명이 참가했던 코스프레는 올해 행사에서는 1000명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행사로 급성장했다. 현재 코스프레를 즐기는 마니아는 약 4만명 정도. 이제는 10대들을 겨냥한 웬만한 이벤트에는 부대행사로 코스프레가 빠지지 않는다. 코스프레를 전문적으로 하는 코스플레이어 중에는 팬클럽까지 거느린 ‘스타’도 있다.

요즘 코스프레의 특징은 거리를 돌아다니는 ‘자유 코스’ 보다 무대위에서 공연을 펼치는 ‘무대 코스’가 늘고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개인 참가보다는 5∼20명씩 팀을 이뤄 참가하는 추세다. 또 만화캐릭터가 대부분이던 초기와 달리 게임캐릭터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

코스프레가 인기를 끄는 가장 큰 이유는 ‘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점. ACA의 유재황회장은 “영화 등 다른 문화 장르는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즐길뿐이지만 코스프레는 내가 주체가 돼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놀이문화라는 점에서 급속도로 퍼지고 있는 것 같다”고 설명했다.

<강수진기자>sjka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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