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차량 입찰에 출혈 경쟁 심화… 잦은 고장에 시민 불안 커져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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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소기업이 미래다] 국내 철도차량 발주 문제점과 과제
입찰 평가기준 강화 목소리에… 서울교통공사, 사전규격 공개
일부 업체 이의 제기로 원점… 최저가 낙찰자가 연이어 수주
품질 문제로 납기 지연 반복
“시대에 맞게 계약 방식 바꾸고, 안전성-편의성 우선해 선정을”

5호선 신조전동차
5호선 신조전동차
올해 7월 서울교통공사는 수명이 다한 노후 전동차를 교체할 목적으로 5, 7호선 전동차 216량 구매를 위한 입찰을 준비하면서 기술평가 기준을 강화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해 초안을 마련하고 사전 규격을 처음 공개했다. 그동안 평가 기준이 낮고 변별력이 없다는 지적을 받자 대안 마련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기준을 바꿀 시 기술평가에서 탈락할 수 있다는 일부 업체의 이의 제기로 인해 기술평가 기준은 결국 이전으로 돌아갔다. 기술력 평가를 위한 제도가 맹탕이라는 지적을 받는 상황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10월 20일에 발표한 입찰 결과는 입찰에 참여한 모든 업체가 예상한 대로 어렵지 않게 기술평가를 통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시의 총 사업 금액 2885억 원에서 조달청이 기초금액으로 산정한 2798억 원의 86%에 해당하는 2397억 원(한 량당 10억1000만 원)의 최저가에 낙찰됐다. 이에 대해 입찰에 의한 출혈 경쟁을 의심하는 업계 시각이 있다.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동종의 전동차 평균 가격으로 여겨지는 한 량당 14억 원은 물론이고 지난해 한 업체가 서울교통공사에서 수주한 전동차보다도 량당 7000만 원가량 낮은 입찰가다. 원가 경쟁에 의한 출혈 입찰이라는 지적이 제기되는 배경이다.

한 관계자는 “처음 공개한 기술평가 기준대로 입찰 공고를 했다면 일부 제작사는 기술평가 기준 점수인 85점을 넘지 못했을 것”이라며 “완화된 기술평가 기준을 적용하면서 3개사가 모두 기준 점수를 넘게 됐다”라고 말했다. 이후 일각에선 최저가 낙찰제의 오류라는 비판이 제기됐다.

계약 이행 능력 부족에도 페널티 없어
업계에서 최저가 낙찰제를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가 있다. 기술평가를 통과하고 저가 수주에 의해 계약을 맺었으나 실제 납품하지 못하는 사례가 빈번하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철도공사와 함께 서울교통공사가 구매 계약한 전동차 계약의 대부분이 계약자의 기술과 생산 능력 부족 등 전반적인 계약 이행 능력 부족으로 인해 오랫동안 납품이 지연돼 문제가 됐다.

서울시의 정상적인 노후 전동차 교체 일정에 심각한 차질을 초래하면서도 납기 지연을 일으킨 업체가 아무런 제재 없이 계속 수주하면서 생산을 못했는데도 계약 금액의 거의 50%에 달하는 대금이 지급되는 상황까지 발생했다. 최근 서울교통공사가 도입을 발표한 신조 전동차가 2019년에 계약돼 오랫동안의 납품 지연 끝에 이제야 도입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업계 관계자는 “계약한 전동차의 납품 지연이 연속되면서 노후 차량을 제때 교체하지 못해 잦은 고장과 불안한 운행으로 아침저녁으로 전동차를 이용하는 수많은 서울시민에게 불편과 불안감을 주게 됐다”며 “2018년 이후 최저가로 계약한 전동차가 제대로 납품되지 못하면서 기존 전동차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유지보수 비용 증가 등 많은 경제적 손실을 일으켜 시울시의회와 국회 감사에서 심각한 우려와 지적을 받고 있는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변별력 없는 기술평가 제도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면서 입찰 과정이 최저가 입찰제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저가 입찰제는 업체들의 과당경쟁을 부추기는 가운데 계약 이후에는 품질이 검증되지 않은 저가 위주의 제품이 사용되는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또 다른 업계 관계자는 “‘우선 입찰을 따고 보자’는 최저가 입찰은 계약의 이행 과정에서 업체가 자신의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질 낮고 값싼 부품을 사용해 전동차의 품질과 성능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서울시민에게 전동차 이용에 대한 불신을 주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최근 계약한 전동차들이 과거보다 품질이나 성능이 뒤지는 해외 부품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저가 중국 제품 등 해외 부품 비중이 과거보다 현저하게 많아진 가운데 유지보수 비용의 증가도 우려되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가 제기되자 서울교통공사는 기술평가 기준을 전면 수정해 한층 까다로워진 사전 규격을 7월 7일부터 16일까지 10일간 공개했다. 기술평가에 대한 기준치를 높인 것인데 일부 제작사는 “서울교통공사가 평가 기준을 바꾸면서 되레 불공정한 입찰 구조를 만들고 있다”고 반발했다. 그러자 서울교통공사 측은 ‘계약심의위원회’를 거쳐 기술평가 기준을 이전보다 못한 수준으로 대폭 후퇴했다. 기술평가는 시민 안전과 직결된 문제임에도 기업 입장을 우선시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최저가 구매 대안 고민 필요” 목소리
업계에선 대량 수송 수단으로서 철도차량의 품질과 성능 확보를 통한 안전성과 편의성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진다.

정부와 공공기관이 발주자 고유 권한을 지켜야 한다는 지적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신이 원하는 제품을 제대로 된 품질로 제때 정상적인 가격으로 구매하기 위한 최소한의 조치인 기술평가 기준은 발주자가 구매하고자 하는 제품의 시장 환경을 고려해 최선의 기준으로 만드는 것이다. 일부 업체가 주장하듯이 ‘불공정한 입찰 구조’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발주자 고유 권한임에도 눈치를 보는 문화가 적지 않다”고 비판했다.

서울교통공사의 기술평가 기준 강화와 같은 조치는 그동안의 정당한 행위임을 인정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동안 철도공사, 서울교통공사, 에스알티, 부산교통공사 등의 철도차량 발주 기관들은 제작 품질, 납기 지연 등의 문제로 국회, 시의회 등의 감사에서 계속 지적을 받게 되며 기술평가 문턱을 높이려고 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이런 시도가 일부 제작 업체의 반발과 공사 측의 무기력한 수용으로 흐지부지되고 있어 안타깝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 ‘협상에 의한 계약’ 구조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 철도차량 입찰 제도는 철도차량의 태동기인 1970∼80년대에 ‘최저가 입찰제’로 시작해 2000년대 이후로 지금의 ‘가격·기술 분리 2단계 공개 경쟁입찰’ 구조로 점차 정착돼 왔다.

하지만 이 시기는 출혈경쟁으로 만성 적자를 기록하고 있던 철도차량 제작 3사가 당시 우리나라 경제 위기를 맞아 정부 주도로 하나로 통합했던 것과 맞물리면서 사실상 본질적인 제도의 문제가 제기되지 못했다. 2015년 이후로 국내 철도차량 산업이 새로운 경쟁 체제로 바뀌면서 급격하게 많은 문제가 본격 노출되고 있다.

과거와 비교하면 국내 철도차량 기술은 속도, 안전성, 편의성 등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으며 그 근간에는 고속철도의 도입과 함께 현대적 차량 제작 기법의 도입과 같은 제도적 지원, 기술 발전을 위해 각고의 노력을 아끼지 않은 수많은 철도인의 피땀, 이를 실제 차량으로 구현한 국내의 철도차량 제작 종사자들의 노력이 켜켜이 쌓여 있다. 하지만 지금의 철도차량 구매 제도는 이러한 기술적 발전에 걸맞은 시대적 요구 사항을 전혀 담아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최근 수년간 철도차량의 모든 구매 계약에서 출혈경쟁이 의심되는 최저가 계약이 이뤄졌고 이행 과정 곳곳에서 기술, 계약 관리 등 이행 능력 부족으로 걷잡을 수 없는 납품 지연과 함께 저가 부품 사용에 의한 저품질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따라서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계약 방식의 변경이 중요한 상황”이라고 진단했다.

우리나라의 철도차량 구매 입찰 제도가 이처럼 혼란에 빠져 있는 동안 세계 철도 선진국은 철도차량의 기술을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안전성 및 편의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아울러 건전한 경쟁을 유도하기 위해 오래전부터 입찰자의 기술 개발을 포함한 계약 이행 능력을 정확하게 판단하는 방법으로 협상에 의한 계약 방식이 보편화돼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지멘스, 알스톰 등 굴지의 철도차량 제작사들도 유럽 발주자의 엄격한 평가 기준을 통과하지 못하고 탈락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철도와 같은 공공재 산업의 기술 발전과 세계적인 경쟁력 확보는 국가의 정책 방향에 따라 심각하게 영향을 받는 만큼 그 역할 또한 막중하다는 것을 여러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세계 철도 강국 중 한 곳인 중국, 세계 최장 노선인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운영하는 러시아, 세계 최고 수준의 철도차량 기술을 보유한 일본 등과 한반도 철도 주권을 두고 경쟁해야 하는 상황에서 국가 경쟁력 약화도 걱정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국내 철도 업계 관계자는 “지금과 같이 누구를 위한 구매 입찰인지 알 수 없는 철도차량의 사실상 최저가 입찰 제도는 하루빨리 협상에 의한 계약으로 바뀌어야 한다”라며 “지금이라도 개선 대책을 마련하지 않는다면 조만간 심각한 국부 유출과 국민의 생명을 위협하는 안전사고에 직면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경고했다.

태현지 기자 nadi11@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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