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소년에서 영화-자동차광으로…세계적 경영인 된 몰입 습관

이건혁기자 , 김현수기자 입력 2020-10-25 17:17수정 2020-10-25 1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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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둔의 제왕(The Hermit King).’

2003년 11월 24일 미국 시사주간지 뉴스위크가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다룬 커버스토리에 붙인 제목이다. 이 회장은 말수가 적었고 여러 사람과 어울리기보다 혼자 몰입하는 걸 좋아했다. 당시 이 회장 인터뷰를 시도하다 실패한 뉴스위크가 붙인 이 별명은 수년간 이 회장을 따라다녔다.

이 회장은 은둔자 기질 탓에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후계자로 지목됐을 당시에도 사업가로 적합하지 않다며 반발하는 기류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 회장은 몰입을 통해 해법을 찾았으며, 이를 반드시 현실로 만드는 실행력을 갖고 있었다.

● 영화광, 자동차광…세계 1위는 몰입에서 출발
이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사업가 이병철의 3남으로 태어났다. 집안의 사업이 바쁘다며 젖을 떼자마자 경남 의령군의 할머니에게 가서 자랐다. 이 회장은 할머니가 어머니인 줄 알고 자라다 3세가 돼서야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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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곧이어 터진 6·25전쟁과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마산, 대구, 부산으로 학교를 5번 옮겼다. 5학년이 되자 부친의 뜻에 따라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아홉 살 많은 둘째 형(고 이창희 새한미디어 회장)과 함께 살면서 자신이 흥미를 가진 분야에 몰입하는 습관이 생겼다. 3년 동안 영화만 1300여 편을 봤다. 주인공, 조연, 감독 등 각각의 입장에서 분석하다 보니 같은 영화를 여러 번 반복해 보는 습관도 생겼다. 영화감독을 꿈꾸기도 했던 이 회장은 “영화 분석을 통해 경영에 필요한 입체적 사고를 키웠다”고 주변에 말했다.

이 회장의 마니아적 기질과 관련된 일화는 수없이 많다. 미국 조지워싱턴대 유학 중에는 1년 반 동안 차를 여섯 번 바꾸며 자동차를 직접 분해하거나 조립했다. 각종 전자제품도 수없이 가져다 분해했다. 이런 습관은 경영자가 된 뒤에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세계 1등 기업의 제품을 분해하고 삼성 제품과 비교하는 선진 제품 비교 전시회를 1990년대부터 매년 열었다. 이 회장의 이 같은 몰입 성향은 삼성을 세계 최고 기업의 반열에 끌어올리는 원동력이 됐다.

● 냉철했지만 소탈했던 인간적 모습도
이 회장은 대외 활동을 자제하는 데다 평소 표정 변화를 거의 드러내지 않아 냉철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소탈하면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보였다.

이 회장의 고교 시절 담임교사를 맡았던 고 박붕배 서울교대 교수(2015년 별세)는 “친구들과 장난도 잘 치고 도시락도 뺏어 먹고 뺏기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잘난 체를 하지 않고 부자 아들이라는 티를 안 냈다”고 기억했다. 또 다른 고교 은사는 “나는 한참 뒤까지 그 애가 이병철 회장의 아들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이 회장과 함께 서울사대부고를 다닌 박영구 전 삼성코닝 사장은 “이 회장이 평소 참여하던 사내 고교 모임에 어느 날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중에 들어보니 ‘내가 편하고 좋다고 동문들을 따로 만나면 다른 직원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처음엔 섭섭했어도 나중엔 이해가 됐다”고 말했다.

이 회장은 직원들의 사진 촬영 요청에 흔쾌히 응했고, 구내식당에서 일반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는 모습도 종종 포착됐다. 이 회장은 경기 용인시 에버랜드를 들렀을 당시 그를 알아본 관람객들이 몰려들자 경계하는 수행원들을 물러나게 한 뒤 인사를 나눴고, 사인해 달라는 요청에도 흔쾌히 응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애견가로도 유명하다. 고인은 동아일보에 연재한 자전적 에세이 중 ‘개를 기르는 마음’이란 편에서 “나는 6·25전쟁이 막 끝났을 무렵 부친의 손에 이끌려 일본으로 건너가 거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혼자 있다 보니 개가 좋은 친구가 됐고 사람과 동물 간에도 심적 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고 썼다. 1997년 영국의 애견단체인 ‘프로 도그스 내셔널 채러티’가 애견가에게 수여하는 ‘레슬리 스콧 오디시 메모리얼’상의 수상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이 회장은 어느 날 한 임원을 불러 “사장들 가운데 보신탕 먹는 사람이 있느냐”고 물은 뒤 명단을 적어 오라고 한 적도 있다. 당황한 임원이 “혼내실 것이냐”고 물었다가 이런 대답을 들었다. “개를 한 마리씩 사주겠다.”

이건혁기자 gun@donga.com
김현수기자 kimhs@donga.com기자페이지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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