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업체만 납품 가능한 규격 요구 ‘스펙 알박기’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3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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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企 조달시장 전면감사]
정부, 규격 사전공개 강화했지만… 지자체-공공기관 무시하기 일쑤

경북의 중소 보일러시스템업체 A사 대표는 올해 한 지방자치단체의 입찰공고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입찰 시방서(공사 순서를 적은 문서)에 “보일러의 안정적인 연소를 위해 ‘공연비 자동제어장치’는 독일산 부품이 들어간 컨트롤러 제어 방식으로 한다”고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컨트롤러 제어 방식을 사용하는 업체는 B사밖에 없는 상황에서 다른 제어 방식을 사용하는 A사가 낙찰을 받기 위해선 현재 시스템을 전부 바꿀 수밖에 없었다. A사 대표는 “지자체가 B사를 위해 의도적으로 해당 규격을 요구한 것”이라며 분통을 터뜨렸다.

조달업계에선 공공조달에 나선 지자체나 공공기관이 특정 업체를 밀기 위해 해당 업체만 갖고 있는 규격을 요구하는 것을 이른바 ‘스펙 알박기’라고 부른다. 형식적으로는 경쟁입찰이지만 실상은 수의계약이나 다를 바가 없는 셈이다.

그간 논란이 계속되자 기획재정부와 조달청은 지난해 11월 조달청에만 의무화된 ‘구매규격 사전공개 제도’를 지자체나 공공기관의 자체 발주 사업까지 확대하겠다고 발표했다. 중소기업들이 입찰 공고 전에 규격을 확인해 지자체 혹은 공공기관 내부의 계약심의위원회에 이의를 제기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공공조달 시장에서 자체 발주가 차지하는 비중은 약 70%에 이르는 만큼 스펙 알박기로 인한 입찰비리를 근절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현장에선 여전히 스펙 알박기가 성행하고 있다. 올 1월 1일부터 구매규격 사전공개 제도가 전 기관에 의무화됐지만 발주기관이 이를 무시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한 중소기업 대표는 “해당 규격이 문제가 있다고 이의를 제기해도 발주기관이 ‘우리는 꼭 그 규격을 갖춰야 된다’며 요지부동하기 일쑤”라고 말했다.

계약심의위원회가 사실상 발주기관의 거수기 역할만 하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힌다. 위원회는 15인 안팎의 지자체 공무원(공공기관 직원) 및 민간인으로 구성되는데 주로 공무원의 뜻에 따라 사안이 결정된다. 심의안이 회의를 앞두고 급하게 전달돼 내용 파악조차 못 하는 위원들이 많다. 담당 부서에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심의를 생략한 채 무조건 원안대로 심의해 달라고 압박한다. 지자체 담당 공무원은 “실제 회의를 열지 않고 서면회의로 대체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라고 귀띔했다.

업계에선 단순히 구매규격 사전공개 제도를 확대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제도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점검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기재부는 이와 관련해 “상반기(1∼6월) 내에 운영실태를 점검해 제도의 미비점을 보완하겠다”고 설명했다.

세종=손영일 기자 scud2007@donga.com
#납품#조달시장#전면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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