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속의 이 한줄]정주영 “돈이란, 큰 돈도 작은 돈도 드러나지 않게 써야”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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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이란 큰 돈도 작은 돈도 드러나지 않게 쓰는 것이 원칙이다. 예를 들어 음식점에서 팁을 줄 때도 다른 사람 모르게 주는 것이 예의지, 기생 이마에 돈을 붙여주는 따위의 행동은 한 인간이 한 인간을 멸시하는 작태이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정주영·제삼기획·1991년) 》

이른바 ‘땅콩 회항’ 사건 이후 한동안 잠잠했던 기업 총수들에 대한 관심이 최근 들어 다시 높아지고 있다. 롯데그룹 ‘형제의 난’은 한 달 가까이 재계를 들썩이게 하고 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을 비롯해 기업인 14명이 사면을 받았다. 안하무인 재벌 3세 조태오(유아인)가 무대포 형사 서도철(황정민)에게 두들겨 맞는 영화 ‘베테랑’은 이날 관객 수 400만 명을 넘으며 흥행 신호탄을 올렸다.

이 시점에 우연히 고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자서전을 읽었다. 책이라기보다는 구전 신화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평생 시골에서 썩는 삶이 지겨워 수백 리 길을 걸어 가출했다 잡혀 오는 내용은 기업 총수의 인생이라기보다 흑백 TV 소설 같았다.

정 전 명예회장은 마지막 가출 시도가 성공해 공사판 잡역부와 쌀 배달부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다. 울산 현대중공업 본사에 있는 아산 기념 전시실에는 정 전 명예회장이 십수 년을 신었던 구두가 놓여 있다. 오래 신기 위해 밑창에 징이 박힌 구두다.

책을 읽고 남은 것은 장장한 고생담도, 현대그룹 창업주의 성공 신화도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된 정 전 명예회장이 손자 세대를 걱정하는 마지막 장이었다. ‘듣자 하니 며느리들이 손주들을 사립 초등학교에 보내고 개인 승용차를 태우고 다닌다는데, 아들들이었으면 어림도 없었겠지만 그와 또 달라서 뭐라 할 수가 없고 걱정이다’ 하는 내용이었다. 한 그룹의 정점에 오른 이였지만 일생 동안 사치와 부패를 경계한 것이다. 정 전 명예회장이 세상을 떠난 지 15년째다. 오늘날 한국 기업계에 고인이 평생 지켜온 그 경계심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궁금하다.

곽도영 기자 no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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