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전자, 현대자동차 등 주요 대기업들이 사상 최대 실적을 올리는 가운데 중소기업의 체감경기는 나아지지 않는 ‘대기업의 성장 독식(獨食)’ 현상이 나타나자 대통령과 경제 관료들은 연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고 있다. 하지만 상당수 경제 전문가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양극화 심화는 ‘수출 호조→투자와 고용 증대→내수 확대’로 이어지는 경제 선순환 구조가 외환위기 이후 와해된 것이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지적하며 “정부가 대기업의 등을 강제로 떠민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고 말한다.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해법은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 육성이다.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이 많아져야 수출과 내수가 함께 커질 수 있다는 것이다.》
○ 사라진 ‘경제 선순환 구조’
1997년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수출이 잘되면 그 효과가 산업 전반에 넘쳐흘렀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1970년부터 외환위기 이전까지 수출과 내수의 상관관계는 0.98이었다. 1에 가까울수록 수출과 비례해 내수도 늘어난다는 의미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비례관계가 깨지기 시작했다. 1998∼2005년 수출은 연평균 11.6% 늘었지만 내수는 0.02% 감소했다. 올해 2분기에도 수출은 전분기보다 7.1% 늘었지만 내수는 1.4% 증가에 그쳤다. 수출 산업은 대규모 자본과 시설이 필요하기 때문에 주로 대기업이, 내수 산업은 주로 중소기업이 담당한다. 경제 선순환 구조가 깨져 중소기업이 가장 큰 타격을 입게 된 것.
경제 선순환 고리가 약해진 현상은 우선 투자에서 감지된다. 2005년 삼성전자가 생산한 휴대전화 1억300만 대 중 75%인 7700만 대가 경북 구미공장에서 출고됐다. 이후 총생산량은 2007년 1억6100만 대, 지난해 2억2700만 대로 늘었지만 국내 생산 비중은 같은 기간 52%, 22%로 줄었다. 대기업의 투자가 해외로 새나가고 있는 것이다.
고용에도 빨간불이 들어왔다. 대기업의 국내 투자가 주로 자동화 설비와 정보기술(IT)에 집중되다 보니 매출 증가액만큼 고용이 늘지 않고 있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007년 기준 IT 제조업의 취업유발계수는 5.7로 제조업 평균(9.2)을 밑돌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차 10억 원어치를 생산하면 10명의 일자리가 생기지만 IT 제조업은 10억 원어치를 생산해도 약 6명의 일자리가 느는 데 그친다.
○ 해법은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
수출 호조가 내수 확대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내수 확대’용 주사를 곧바로 놔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 육성이 절실하다. 기술력이 있는 중소기업이 부족하면 대기업이 아무리 투자를 늘려도 그 과실은 선진국의 중소기업이 따먹게 된다. 국내 디스플레이업계는 올해 8조2000억 원을 투자한다고 발표했지만 능동형 유기발광다이오드(AMOLED) 생산 장비를 포함한 핵심 부품은 대부분 일본에서 수입한다. 국내 전자업계 관계자는 “품질을 따지다 보면 아무래도 독일이나 일본 부품을 사 올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지식경제부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 기업들이 국산 부품을 사용한 비율은 70.1%. 그러나 한국 수출을 이끄는 휴대전화, 전자, 통신기기 등 IT 제품은 국내 부품 비중이 43.6%에 불과했다. 정유훈 현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수출 대기업이 부품을 국내에서 조달하게 만들려면 국내 중소기업의 기술력을 높일 수밖에 없다”며 “중소기업이 대기업의 단순 하청관계에서 벗어나 협력회사라는 대등한 관계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기술력’이 필수”라고 말했다. 산업기술진흥협회의 최근 조사에 따르면 설립 10년차 자체 연구소를 둔 중소기업 835개 중 7개 기업(0.8%)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이는 일반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성장하는 비율(0.1%)보다 8배나 높다.
하지만 국내 중소기업 현실은 열악하다. 중소기업은 우선 기술 개발을 위한 인재를 구할 수 없다. 대전에서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중소기업 B사 사장은 “해외 영업으로 활로를 넓히려 해도 영어와 마케팅 능력을 갖춘 인재를 도저히 뽑을 수가 없다”며 “사회의 모든 시스템과 모든 구성원의 인식이 대기업 위주로 고착돼있는 곳이 한국”이라고 말했다. 이익이 남으면 기술 개발에 투자하려는 중소기업의 노력도 부족했다. 올해 7월을 기준으로 대기업 38.8%가 연구개발(R&D) 연구소를 갖고 있지만 중소기업은 0.6%만 연구소를 뒀다.
○ 중소기업 고유분야 지정, 기술 발전 유도
일본은 1980년대 중반부터 엔화 가치가 높아지면서 대기업들이 해외로 생산거점을 옮기고 해외 부품을 사들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현재 한국과 마찬가지로 중소기업이 설 자리를 잃었다.
일본 정부는 1999년 기존의 중소기업기본법을 전면 개정하면서 녹색기술 같은 신성장 분야에서 중소기업을 집중 지원하도록 했다. 개정법은 중소기업의 기술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기술 개발 시 교육비를 지원하고 조세를 감면하는 파격적인 혜택을 줬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하청중소기업진흥법을 만들어 대기업과 하청기업이 지켜야 할 엄격한 기준도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대기업이 중소기업에 위탁 생산할 분야를 명확하게 밝히고 △납품단가 결정과 납품검사 방법을 구체화했으며 △납품업체의 생산성 향상 방안에 대한 것까지 명시했다. 이에 따라 일본 대기업은 원칙적으로 하청대금을 깎을 수 없고 반품을 할 수 없다.
기획재정부 고위 당국자는 “중소기업만 진입할 수 있는 분야를 만들고 대기업이 하청대금을 깎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은 한국도 검토할 만하다”고 말했다.
중국은 기술 집약형 중소기업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을 보낸 사례다. 지난해 8월 원자바오(溫家寶) 총리 주재로 열린 국무원 상무회의에서 35억1000만 위안(약 6054억3990만 원)의 예산을 배정한 ‘중소기업 지원을 위한 6대 조치’를 발표했다. 이 중 중소기업의 기술 촉진을 지원하는 기술혁신 지원금으로만 14억 위안을 배정했다. 중국 과학기술부는 대학과 연구기관에서 기술 인력 10만 명을 중소기업에 지원하기로 했다.
허대식 연세대 경영학과 교수는 “모든 중소기업을 끌고 가는 정책을 버리고 기술력 있는 중소기업을 정부와 대기업이 파격적으로 키워주도록 중소기업 정책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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