짓다만 꿈의 인공섬엔 건설자재만 나뒹굴어…

  • 동아일보
  • 입력 2009년 11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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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두바이 신화’ 현장을 가보니

팜 주메이라 호텔 30개중 지어진 곳은 고작 1곳뿐
현지인들 아직 낙관적… 주말맞아 쇼핑몰 북적

그동안 불모의 사막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가장 큰 인공 섬 등을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며 세계의 찬사를 받던 ‘두바이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두바이가 위기를 넘겨 신성장모델로 계속 주목을 받을지, 무리한 탐욕이 낳은 ‘현대판 바벨탑’으로 남을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바이가 금융상업 중심지로 개발 중인 비즈니스베이와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두바이. 두바이=장원재 기자
그동안 불모의 사막에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 가장 큰 인공 섬 등을 만드는 기적을 연출하며 세계의 찬사를 받던 ‘두바이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 두바이가 위기를 넘겨 신성장모델로 계속 주목을 받을지, 무리한 탐욕이 낳은 ‘현대판 바벨탑’으로 남을지 세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두바이가 금융상업 중심지로 개발 중인 비즈니스베이와 세계 최고층 빌딩 버즈두바이. 두바이=장원재 기자

28일 오전 11시. 걸프 만을 매립해 만든 인공 섬 팜주메이라의 외곽 해변에는 나힐사(社)가 호텔로 개발하려던 용지가 황량한 모습을 드러낸 채 방치되어 있었다. 안에는 모래언덕과 함께 건설 자재가 여기저기 뒹굴었다. “언제 공사가 시작되느냐”고 묻자 공터를 지키던 이 회사 직원은 “나도 모른다”며 손을 내저었다.

옆에서 짓고 있는 ‘시바의 왕국’ 리조트도 원래 올해 개장 예정이었지만 아직 제대로 외관조차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건축 사상 8번째 불가사의’로 불리며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세계 최대의 인공 섬 팜주메이라(면적 560만 m²). 당초 30여 개의 호텔을 세우려고 했지만 현재 운영되는 호텔은 아틀란티스 호텔 하나뿐이다.

그나마 가장 규모가 작은 팜주메이라는 완공돼 사정이 나은 편이었다. 다른 인공 섬 팜제벨알리(1200만 m²)는 매립만 한 채 공사대금을 제대로 주지 못해 인프라 공사가 중단됐으며 가장 규모가 큰 팜데이라(4635만 m²)는 아직 매립조차 못했다.

인공 섬 프로젝트를 추진하던 나힐은 두바이 최대 국영기업인 두바이월드의 자회사. 나힐이 다음 달 14일 만기인 35억 달러의 채권을 갚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두바이 재무부는 지난주 채권단에 6개월의 채무상환 유예를 신청했다. 채권단은 아부다비 상업은행 등 아랍에미리트 금융회사들이 주축이며 유럽계도 포함돼 있다.

‘사막 위의 기적’으로 불리며 세계를 놀라게 했던 두바이의 신화가 뿌리째 흔들리고 있음을 기자는 현지 여러 곳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두바이 쇼크’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국제금융시장은 서서히 숨고르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지만 여진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이곳 현지 전문가들은 원유생산량이 미미한 두바이가 그동안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에 몰두하며 지나치게 부동산 사업을 확장한 것이 이번 사태를 불러왔다고 입을 모은다.

대표적인 예가 두바이 최대의 항만 제벨알리를 둘러싼 대형 프로젝트다. 두바이월드의 자회사 나힐은 두바이 서남쪽 제벨알리 항구 인근에 인공 섬 팜제벨알리와 수변공간(워터프런트)을 건설해 2020년까지 현재 두바이 인구보다도 많은 170만 명이 거주하도록 하겠다는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다.

누가 봐도 쉽지 않은 계획이었지만 당시 ‘두바이 효과’에 매료된 세계인들은 찬사를 보냈고 나힐은 실제 매립을 진행했다. 두바이월드의 또 다른 자회사인 리미트리스는 ‘다운타운 제벨알리’ 프로젝트를 통해 300여 개의 빌딩을 짓겠다는 계획도 밝혔다.

하지만 기자가 제벨알리 지역을 찾았을 때 눈에 들어온 것은 황량한 사막뿐이었다. 두바이 시내로 돌아오는 길에 ‘다음은 무엇(What next?)’이라고 쓰인 나힐의 선전용 깃발만이 나부끼고 있었다.

걸프리서치센터의 에커르트 워츠 연구원은 인터뷰에서 “두바이는 구조조정을 거친 후 앞으로도 중요한 무역 허브 역할을 하겠지만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며 “정부의 채무상환유예 요청은 지나친 야망의 끝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 고층 빌딩마다 ‘임대’ 현수막… 부동산가격 50% 폭락 ▼

올해 개장은커녕 외관공사도 못끝내
두바이가 세계 최대의 인공 섬으로 홍보하던 팜 주메이라의 외곽 지역. 나힐이 호텔로 개발하려던 땅이 황량하게 남아 있다. 정면의 건물은 ‘시바의 왕국’ 리조트 건설 현장. 예정대로라면 올해 문을 열어야 하지만 아직 외관 공사도 끝나지 않았다. 두바이=장원재 기자
올해 개장은커녕 외관공사도 못끝내
두바이가 세계 최대의 인공 섬으로 홍보하던 팜 주메이라의 외곽 지역. 나힐이 호텔로 개발하려던 땅이 황량하게 남아 있다. 정면의 건물은 ‘시바의 왕국’ 리조트 건설 현장. 예정대로라면 올해 문을 열어야 하지만 아직 외관 공사도 끝나지 않았다. 두바이=장원재 기자

기자가 두바이를 찾은 28일과 29일 시내는 예상외로 조용했다. 두바이 최대 국영기업인 두바이월드의 채무상환 유예 선언으로 국제금융시장이 한때 패닉 상태까지 갔던 것을 떠올리면 의외로 차분한 모습이었다. 이슬람 축제인 ‘이드 알 아드하(희생제)’와 국경일을 맞아 대부분의 관공서와 공기업은 다음 달 5일까지 문을 닫는다. 위기의 진앙인 두바이월드와 나힐도 예외는 아니다.

○ 1년 만에 연간 주택 임차료 7400만 원→4670만 원 ‘급락’

거리는 평온했지만 두바이 경제를 이끌어온 부동산 경기가 가라앉는 분위기는 곳곳에서 감지됐다. 두바이 시내를 관통하는 셰이흐자이드 로드 옆의 고층 빌딩에는 ‘사무실 임대(Offices to Let)’라고 적힌 대형 현수막이 두세 건물마다 하나씩 붙어 있었다. 비즈니스베이, 주메이라 레이크 타워 등 최근 도심지로 조성되는 곳에서는 공사가 중단되거나 더디게 진행되는 현장도 적지 않았다.

시내에서 만난 한국 건설사 관계자는 “부동산 가격이 지난해 고점 대비 거의 50%나 떨어졌다”며 “부동산 시장에서는 나힐이 12월에 채무를 갚을 수 있을지를 두바이 경기 회복의 지표로 보고 있었던 터라 이번 사태로 부동산 가격의 추가 하락이 우려된다”고 말했다.

실제로 도심 인근의 침실 3개짜리 빌라의 경우 연간 임차료가 지난해 말 23만 디르함(약 7400만 원)에서 최근에는 14만5000디르함(약 4670만 원)으로 약 37% 하락한 상태다. 이와 관련해 투자은행 UBS는 최근 두바이의 부동산 가격이 현재 수준에서 30% 더 떨어질 것으로 전망했다.

○ 아부다비 두바이 협상 ‘줄다리기’

“사무실 임대합니다”
29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시내의 한 빌딩 외벽에 ‘사무실 임대’ 광고가 붙어 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서 두바이 시내에는 완공 후에도 비어 있는 사무실이 적지 않다. 두바이=장원재 기자
“사무실 임대합니다”
29일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시내의 한 빌딩 외벽에 ‘사무실 임대’ 광고가 붙어 있다. 부동산 경기가 침체되면서 두바이 시내에는 완공 후에도 비어 있는 사무실이 적지 않다. 두바이=장원재 기자
현 상황에서 두바이가 기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아랍에미리트 수도 아부다비다. 아랍에미리트 최대 산유국으로 8000억 달러가 넘는 세계 최대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부자 이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외국인투자가들 사이에서는 아부다비가 지원의 대가로 두바이의 국영항공사인 에미레이트항공과 중동 최대의 항만 운영사인 DP월드를 요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다. 채무상환유예를 신청하기 직전 두바이가 100억 달러를 요구했음에도 50억 달러만 준 것도 두바이의 물류 허브 기능을 가져오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는 것이다.

아부다비 정부 관계자는 이날 로이터와의 인터뷰에서 무조건적인 지원은 지양할 것이라고 선을 그으면서도 “두바이가 내건 약속들을 검토한 뒤 사안별로 접근해 언제 어디서 두바이 기업을 도울 것인지를 선택할 것”이라며 선별적 지원 방침을 밝혔다. 반면 현지인들은 대체로 무관심하거나 평온한 모습이었다. 28일 저녁에 찾은 ‘더 몰 오브 에미레이트’는 주말과 휴일을 맞아 인파로 북적였다. 이 쇼핑몰의 명물인 실내스키장 ‘스키 두바이’를 보러 인근 국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도 많았다. 이곳에서 만난 대학생 모하메드 리시드 씨(21)는 “이처럼 많은 관광객이 두바이를 찾고 있지 않느냐”며 “당분간 경기 하락을 피할 순 없겠지만 구조조정을 거치면 두바이는 다시 도약할 것”이라고 낙관했다.

내신과 외신 사이의 온도차도 감지됐다. 유력 영자신문인 ‘걸프 뉴스’는 29일자에 “두바이월드의 구조조정을 둘러싸고 세계 금융시장이 지나치게 과민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내용의 기사를 실었다. 반면 외신들은 두바이의 상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실시간으로 중계하는 모습이었다.


두바이=장원재 기자 peacechao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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