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쩐의 전쟁>원작 만화가 박인권의 사채업계 5년 체험

  • 입력 2007년 7월 6일 16시 11분


코멘트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 사진제공 주간동아
‘쩐의 전쟁’ 원작만화가 박인권. 사진제공 주간동아
사채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면서 화제를 모은 드라마 ‘쩐의 전쟁’.
사채의 위험성을 일깨워주면서 화제를 모은 드라마 ‘쩐의 전쟁’.
《사채라는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만들어져 화제를 뿌리고 있는 SBS 드라마 <쩐의 전쟁>의 원작 만화가 박인권씨. 실감나는 작품을 쓰기 위해 직접 전주가 돼보기도 하면서 지난 5년간 사채업계를 취재했다는 그가 들려준 피도 눈물도 없는 사채의 세계와 사채 폐해 대응방법.》

장안의 화제를 불러일으킨 SBS 드라마 <쩐의 전쟁>은 같은 이름의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다. 박인권 화백(53)이 2004년부터 한 스포츠신문에 연재하고 있는 만화 <쩐의 전쟁>이 그것. 신문 연재가 1천 회에 육박하고, 대본소용 단행본이 50권 넘게 출간됐을 만큼 장기 흥행을 하고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사채 폐해와 대응방법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사채 폐해 교과서’라 불릴 정도다.

“제가 <쩐의 전쟁>을 그린 건 우리 사회의 아픔을 이야기하고 싶어서였어요. 드라마에선 남녀간의 사랑이 큰 기둥이지만 원작엔 사랑이야기가 없어요. 시청자들의 요구 때문이라면 할 말이 없지만, 그게 진지함을 희석하는 것 같아 많이 아쉬워요.”

그는 <쩐의 전쟁>을 그리게 된 계기가 있었다고 한다. 빚에 쪼들린 한 가장이 북한강에 투신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는 모든 소지품을 양복주머니에 넣고 가방까지 손에 꼭 쥔 채 강물로 뛰어들었다. 딱 하나 꺼내둔 게 있었는데 가족사진이었다.

“가족만큼은 차가운 물에 젖게 하고 싶지 않은 아버지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어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그런 가족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가족이 해체되고 있는데 그게 바로 돈, 사채 때문이거든요. 금나라의 실제 모델이 있냐고 묻는 사람이 많은데, 금나라 집안처럼 아버지는 카드빚(사채빚)에 허덕이다 자살하고 딸은 유흥업소로 팔려가고, 아들은 평생 신용불량자가 되는 식으로 가정이 파괴된 사례는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어요.”

그는 사채의 세계를 제대로 알기 위해 2년 가까이 취재를 했다고 한다. 사채 피해자들은 물론 사채업자들도 만났고, 자신이 직접 전주(錢主)가 돼 사채를 운용하기도 했다. ‘남자는 상처를 남기고 돈은 이자를 남긴다’ ‘밥보다는 주먹, 주먹보다는 돈’ ‘인류는 망해도 돈은 살아남는다’ 등은 이 과정에서 탄생한 <쩐의 전쟁> 명대사들이다.

“사채의 위험성을 체험하기 위해 악덕 사채업자에게 돈을 빌릴 생각도 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하더라고요. 악덕 사채업자들이 만화가라고, 취재 때문에 돈을 빌려봤다고 해서 저를 봐줄 리 없잖아요. 파멸의 끝이 어디인지 뻔히 보이니 그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더라고요. 그렇다고 건전한 사채업자에게 빌려보는 건 별 의미가 없고…. 그래서 친구에게 5천만원을 빌려주고 그걸로 사채놀이를 하게 했어요.”

하지만 사채놀이를 오래 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만화가가 사채를 한다는 소문이 돌면서 곱지 않은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 나온 ‘싸구려 사채업자는 서류에 연연하지만, 유능한 사채업자는 오직 인간심사만 한다’는 명대사는 이때의 체험에서 나온 것이다.

▼“무조건 무담보로 빌려주겠다는 사채업자가 가장 위험해요”▼

사채의 심각성이 사회문제가 되면서 요즘 방송광고를 하는 대부업체들이 지탄을 받고 있다. 그런데 박 화백은 “그나마 그런 업체는 상대적으로 안전한 편”이라고 한다. 진짜 조심해야 할 것은 미등록 사채업자 중에서 일부 악덕업자들이라고.

사채업자들의 악랄함을 상징하는 게 ‘신체포기각서’다. 이를 근거로 신장 등 장기를 떼어내 빚을 갚게 하거나 여성의 경우 윤락업소에 팔아넘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신체포기각서를 찾아보기 어렵다는 게 박 화백의 이야기다. 신체포기각서를 강요했다가는 7가지 죄목으로 처벌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은 직접적인 폭력, 폭언뿐 아니라 전화나 문자 협박도 형사처벌 대상이다. 욕설만 해도 구속 사유가 된다. 따라서 요즘은 사채업자들도 정도 이상의 협박이나 폭력을 자행하지는 않는다. 대신 악덕 사채업자들의 협박 수단도 그만큼 지능화됐다고 한다.

“지난해 한 교장선생님이 실제로 당한 일이에요. 사채업자가 교장실로 찾아와 적당히 소란을 피우곤 술이나 한 잔 하러 나가자고 했답니다. 교사들 보기 민망해 따라나와 술을 마셨는데, 옆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시비를 걸었어요. 그쪽을 봤더니 ‘기분 나쁘게 쳐다본다’며 주먹을 휘두르고 나가버렸대요. 이때 사채업자가 피투성이가 된 교장선생님을 부축하면서 그러더래요. ‘내 돈 안 갚으면 언제 어디서 주먹이 날아올지 몰라요’라고. 순간 정신이 번쩍 드는 거죠. 그렇게 계획적으로 폭력을 써요. 그렇다고 폭력을 사주했다는 증거가 없으니 고소할 수도 없어요.”

자녀들을 협박하는 수법도 있다. 특히 어린아이나 딸은 채무자에게 아킬레스건이다. 아이의 학교 앞으로 찾아간다. 물론 아이에게 대놓고 협박하면 법에 저촉된다. 인상을 쓰면서 아이의 목덜미를 잡고 살짝 흔들면서 “아버지 힘드시니까 잘해드려라, 아버지에게 다른 데서 돈 쓰지 말라고 해라, 다 우리 같지 않아서 돈 안 갚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라고 위협하면 아이는 겁에 질리게 된다. 하지만 고소를 해도 “정말 걱정이 돼서 한 말일 뿐”이라고 우기면 협박이나 폭력 혐의로 처벌하기가 쉽지 않다.

악덕 사채업자들이 가장 반기는 채무자는 공무원·군인·교사들인데 이런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사채를 빌린다면 대개 도박에 빠진 경우라고 한다.

“원래 돈을 빌려주면서 용도를 묻지 않는 게 철칙이에요. 하지만 공무원·교사·군인들에겐 넌지시 용도를 물어보고 감을 잡아요. 도박 때문이다 싶으면 원하는 대로 100% 빌려줘요. 그러고는 확실하게 뜯어먹죠. 폭력도 서슴지 않아요. 도박 사실이 밝혀져 직장을 잃게 될까봐 신고도 못해요. 법도 무용지물이죠. 이들에겐 고리만 뜯는 게 아니에요. 가령 ‘당신 만나러 가다 교통사고가 나 차 수리비가 3백만 원 들었다’며 내놓으라고 해요. ‘그걸 왜 내가 물어줘야 하냐’고 따지면 ‘당신네 학교 교장에게 받을까’ 하는 식으로 협박해요. 보통 1천만 원 빌려주면 7백만원은 더 뜯어낸다고 봐야죠.”

▼악덕 사채업자들끼리 넘기는 수법으로 몇 백만원 빚이 1년 만에 1억원 넘기도▼

박 화백은 사채에서 제일 위험한 게 인보증을 서는 것이라며 주의를 당부했다. 담보가 없으면 처음부터 인보증을 요구하기도 하고, 이자를 못 갚을 때 이자를 유예해주겠다며 미끼로 인보증을 요구하기도 하는데 절대 여기에 넘어가면 안 된다는 것.

“특히 젊은 여성들이 많이 당해요. 인터넷에 ‘여성전문대출’을 앞세운 대부업체가 있을 만큼 여성에게는 무조건 돈을 빌려주는 데가 많아요. 물론 건전한 곳이 대부분이겠지만 그중에 위험한 곳이 적지 않아요. 여성은 ‘걸어다니는 담보’라고 할 수 있어요. 유흥업소로 보낸다든지 해서 바로 현금으로 ‘환전’이 될 수 있으니까요. 또 채무자 당사자는 물론 가족들을 협박하기도 쉽고요.”

특히 세상 물정 잘 모르는 여대생들은 인보증을 서달라고 매달리는 친구의 간절한 요청을 거절하기 힘들어한다. 그래서 우정이란 이름으로 보증을 섰다 피해를 보는 경우도 많다.

“제 만화를 본 여성이 하소연을 해왔어요. 성형수술을 하려고 2백만 원을 빌리면서 친구 3명을 인보증 서게 했다가 모두 유흥업소까지 가게 됐다고요. 악덕 사채업자들은 인보증을 받아서 한 명에 2천만원씩 받고 유흥업소에 팔아넘겨요. 말은 ‘알바라도 해서 돈을 갚으라’는 거지만 유흥업소에서 하는 일이 알바라고 다른가요. 더구나 빚에 얽매여 있으니 업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죠.”

성형수술이나 명품을 사기 위해 사채를 쓰는 젊은 여성들이 얼마나 될까 싶지만 생각보다 많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실제로 금융감독원이 2006년 말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대부업체 이용자의 절반이 20대 여성이었다.

그는 “사채를 쓰지 않고 제도권 금융을 이용하는 게 제일 좋지만 어쩔 수 없이 사채를 썼다가 피해를 봤다면 서슴지 말고 관계기관에 신고하고 상담을 받으라”고 충고했다. 가족이 알게 되는 게 두려워 속앓이만 하다 보면 사태를 더욱 키울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사채에 대해 이렇게 비유했다.

“사채는 암보다 더 무서운 존재입니다. 사채를 쓰는 건 자신의 신체 일부를 잘라내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액수에 따라 손가락이, 손목이, 또는 다리가 이미 잘라져 있는 것이라고요. 그만큼 사채는 위험합니다. 악성 사채업자들로부터 서민들이 보호받는 그날까지 저의 ‘쩐의 전쟁’은 계속될 겁니다.”

글ㆍ최호열<신동아 기자>

위 기사는 신동아 2007년 7월호에서 발췌한 기사입니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