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돈 이젠 끊자]<上>대기업들 절규

  • 입력 2003년 10월 28일 18시 4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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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 오후 국회의 열린우리당 대표실에서 김근태 원내대표가 경제단체장들과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 원내대표, 박용성 대한상의회장, 김창성 경총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현명관 전경련 상근부회장. -김경제기자
28일 오후 국회의 열린우리당 대표실에서 김근태 원내대표가 경제단체장들과 회동하고 있다. 왼쪽부터 김 원내대표, 박용성 대한상의회장, 김창성 경총회장, 김재철 무역협회장, 현명관 전경련 상근부회장. -김경제기자
검은돈의 제공자이자 수혜자이며 피해자로 정치권과 공생하며 지내온 재계에서도 차제에 과거를 반성하고 정치권과 함께 환골탈태하자는 자성론이 일고 있다. 검은 유착관계의 실태를 살펴본다.

▽피할 수 없는 정치자금=모 그룹 금융계열사의 재무담당 임원인 A씨는 지난해 대선기간 중 정치권의 자금 요청에 골머리를 앓았다.

“정치권이 ‘돈 안 쓰는 선거를 하겠다’고 했을 때부터 걱정이 됐다. 아니나 다를까, 대선기간 중 전화가 많이 걸려 왔다. 액수는 말하지 않고 그냥 ‘어렵다’ ‘도와달라’고만 하더라.”

A씨는 돈을 줬느냐는 질문에 “위로 보고했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정치자금법이 강화되면서 자금 요청이 줄어든 것은 사실이지만 일단 들어온 요청은 뿌리치기 어렵다는 것이 기업인들의 공통된 설명이다. 정치권에서 연락이 오면 기업들은 해당 정당과 정치인의 파워, 그리고 자사의 재계 내 위상 등을 고려하며 복잡한 계산에 들어간다.

10대 그룹 내의 구조조정본부 회계담당 책임자인 B씨는 “1995년 말 노태우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로 밝혀진 기업별 제공액 순위(150억∼60억원)가 정치자금 제공의 기준”이라고 말했다.

B씨는 “정치자금 요구가 들어오면 국내 최대 그룹이 요구받은 액수부터 파악하는 게 급선무다. 최고액이 확인되면 3대, 5대, 10대, 30대 그룹별로 계산이 나온다”고 설명했다.

▽기업 돈에 공짜는 없다=이번 SK비자금이 ‘보험성’이라는 일부의 추론에 기업 임원들은 고개를 가로젓는다. 한 자동차업체 인사담당 임원은 “대기업들은 매년 인건비 상승비용 수십억원을 줄이기 위해 노조와 피 튀기는 싸움을 벌인다. 과연 정치인에게 준 수십억원을 보험성만으로 줬겠느냐”고 반문했다.

정권의 칼날이 자신들에게 겨눠지지 않도록 하는 ‘보험금’이 없진 않지만 대부분은 이권과 맞바꾸는 비용이다. 기업 돈에는 ‘공짜’가 없는 셈이다.

과거 대기업 정보팀에서 일했던 J씨는 “정부 정책에 따라 시장 크기와 기업 성패가 좌우되기 때문에 국회 상임위 의원들이 주요 로비 타깃”이라며 “참여정부에선 공정거래위원회를 담당하는 정무위 소속 의원들도 인기다”고 전했다. 공정위가 최근 대기업 규제의 정책 도구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견그룹 임원인 C씨는 “그룹의 비자금 조성은 뭉칫돈을 만지는 건설 해운 무역업종 계열사 중 문제가 드러나도 주주들의 소송을 피할 수 있는 비상장 회사가 주로 총대를 멘다”고 털어놨다.

▽이제는 함께 털고 갈 때=그동안 정경유착을 끊으려는 재계의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지난해 2월 지방선거와 대선을 앞두고 ‘불투명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두 달 뒤 산하 한국경제연구원의 ‘차기 정부 정책과제’ 보고서를 통해 “불법 정치자금을 고백하고 특별법으로 사면한 뒤 이후의 불법자금 등은 엄정 처벌해야 한다”는 해법을 내놓기도 했다.

올 9월에도 재계는 ‘부당한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또 다시 결의했지만 최근 비자금 정국은 실천 없는 결의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 셈이다.

전경련 국성호(鞠成鎬) 윤리경영팀장은 “정치권에서 자금 수요를 줄이기 위해 획기적인 방안을 마련하고 기업들도 ‘뒷돈’ 비즈니스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동시에 이뤄져야 정치문화가 근본적으로 바뀔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호원기자 bestige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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