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위축 현장르포]"과자,라면도 안 팔려요"

  • 입력 2000년 12월 17일 18시 23분


일주일 전 A은행 지점장에서 퇴직한 이모씨(52)는 대학생과 고등학생인 두 아들에게 ‘용돈 삭감안’을 통보했다. 큰아들은 한달 30만원에서 25만원, 둘째아들은 15만원에서 10만원으로. 이씨는 “아직 일할 기회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경기상황이 단기적으로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아 소비를 최대한 줄이면서 한해 정도 지내기로 가족들과 뜻을 모았다”고 말했다.

소비심리 위축이 심화되고 있다. 냉혹했던 국제통화기금(IMF)관리체제를 경험한 소비주체들은 불황의 조짐을 불안한 눈으로 바라보며 이미 허리띠를 바짝 졸라맸다. 가계소비의 위축으로 연말을 맞은 대형상가들의 대목은 실종됐고 청소년의 용돈이 줄면서 ‘신소비계층’을 대상으로 한 업종들의 매출도 급속히 줄고 있다. 10월말부터는 경기변화에 끄떡없다던 수입명품 소비도 위축되고 있다. 심지어 경기변화에 가장 둔감한 과자나 라면 등 저가 식품류의 소비도 하강세를 타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이번 경기침체의 이색적인 면은 ‘IMF관리체제의 학습효과’가 계층에 따라 정반대로 나타난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고소득층은 ‘경기가 나쁠 때 쓸 사람이라도 써야한다’고 생각하는 반면 중산층들은 ‘소득에 영향이 오기 전에 먼저 씀씀이부터 줄이자’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

▽허리띠를 졸라맨 가계〓택시기사 임모씨(47)는 최근 출근시간인 오전 8∼9시에도 빈차로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손님이 줄어 월수입이 30만∼40만원 줄었다. 최근 “나라도 거들겠다”며 나선 임씨의 아내가 오전에는 학교급식소, 오후에는 봉제공장에서 파트타임으로 일해 100만원씩 벌어와 월수입은 늘었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있다. 임씨는 “중3짜리 딸은 학원을 당분간 쉬기로 했다”고 말했다.

▽신세대의 소비감소〓주머니가 얄팍해진 학생 청소년 등 일명 ‘신소비계층’의 소비위축현상도 뚜렷해지고 있다. C햄버거체인점 신촌점은 상반기 하루평균 2000명이던 고객이 1200명으로 줄었고 평균 구매액도 1인당 5000원에서 4300원으로 줄어들었다. 이 지점 매니저 P씨는 “세트메뉴 하나를 사서 둘이 나눠먹거나 1000원에 파는 특별사은행사 품목만 구입하는 고객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10대와 20대가 주고객인 타워레코드의 이경아 신촌점장은 “학생들이 돈을 아껴쓰면서크리스마스 선물용으로 CD 5장 이상을 한꺼번에 구입하던 고객들이 1, 2장 사는데 그치고 있어 12월 예상 하루매출 2000장에 크게 못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과자도 안팔린다〓제과업체와 라면업체 등 식품업계는 이번 경기침체를 어떤 업종보다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비교적 저가이고 소비층도 청소년층 이하여서 IMF관리체제 때에도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한 업종인데 매출에 적신호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과자업계는 매년 3∼4%의 매출신장을 나타냈으나 올해에는 상반기의 매출호조에도 불구하고 1% 미만 성장에 그칠 전망이다.

D제과업체 관계자는 “IMF관리체제 직후였던 98년에 패스트푸드 고객들이 과자와 라면으로 돌아서면서 매출신장이 10%를 넘었기 때문에 업계에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지만 이번 경기침체는 과자소비까지 줄이는 영향을 주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말했다.

▽명품소비도 하락세〓올해 백화점들의 ‘귀족 마케팅’으로 상반기 폭발적 매출증가를 경험했던 해외 수입명품에도 경기위축의 영향이 미치고 있다. A백화점 본점에서는 10월 한달 루이뷔통 구치 페레가모 등 대표적인 수입명품파트의 전년대비 성장률이 5.5%에 그쳤다. 9월말까지의 총매출이 지난해에 비해 70.5% 늘었던 것을 고려해 볼 때 극적인 반전. 인지도가 낮은 수입브랜드의 경우 이미 마이너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대형상가 연말경기 실종〓동대문의 E대형패션쇼핑몰은 요즘 오후 11시만 되면 한산해진다. 오전 4시까지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리던 예년 이맘때의 풍경은 찾아볼 길이 없다.

2년째 이 상가에서 여성의류 매장을 열고 있는 김미정씨(25)는 “지난해 말 하루 평균 300∼400명의 손님이 찾아와 70벌 이상의 옷을 사갔지만 요즘은 오는 손님이 반으로 줄어 40벌 정도 사가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나마 구입하는 의류도 5000원짜리 티셔츠나 2만∼3만원대 니트류가 대부분이라고. 전자양판점 전자랜드21은 서울 경기지역 매장에서 판매한 난방용품이 지난해 11월에 비해 10분의 1정도 줄어든 2만1100여대로 98년 수준으로 떨어졌다.

용산전자상가에서 PC를 판매하고 있는 송광흠씨(27)는 “지난해 말 방학을 맞는 자녀들의 선물용으로 하루 10∼20대 팔리던 것이 4, 5대 팔리면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중현기자>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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