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출거명 기업 표정]"피 말리는 심정…"

  • 입력 2000년 11월 2일 19시 24분


“우리 회사가 퇴출 된다는 소문을 들을 때마다 날카로운 비수에 뒤통수를 찔리는 기분입니다. 직원들은 근무시간 내내 동요하고 퇴근하면 가족들도 내 눈치만 살피고…. 직장생활 20년 동안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착잡할 따름입니다.”

A기업 K부장은 “요즘은 매일매일 피를 말리는 심정”이라며 “퇴출이든 회생이든 조속히 결정이 났으면 좋겠다”며 연신 줄담배를 피워댔다.

퇴출기업 발표를 하루 앞둔 2일 전국의 기업현장은 시종 뒤숭숭했다. 퇴출대상으로 거론된 기업들은 사내외 인맥을 총동원해 주채권은행과 금융감독원 등을 상대로 자사 명단이 ‘살생부’에 올랐는지 파악하느라 분주했다. 사무실과 공장의 직원들은 삼삼오오 모여 회사와 자신의 앞날을 걱정했다.

▽소문 따라 희비쌍곡선〓‘△△기업은 살리기로 했다더라’ ‘××기업은 아무래도 힘들다던데….’ 탐문 결과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질 때마다 안도와 한숨이 교차했다.

동아건설 퇴출을 계기로 정부와 채권단의 기류가 ‘살릴 기업은 살린다’에서 ‘죽일 기업은 죽인다’는 쪽으로 바뀌자 퇴출대상으로 이름이 오르내린 기업들은 바짝 긴장했다.

하지만 D데이가 임박하면서 각 기업의 생사여부에 대한 가닥이 잡혀가자 회사마다 희비가 엇갈렸다.

쌍용양회의 경우 지난달 31일 일본 태평양시멘트와 공동경영 계약을 체결하고 주금 3660억원이 입금되자 다소 느긋한 표정. 쌍용양회 관계자는 “기업퇴출 방침이 결정된 추석 이후부터 모든 직원이 마음고생에 시달렸다”며 “외자유치가 무산되면 모든 것이 끝장이라는 생각에 초조했는데 계획대로 이뤄져 다행”이라며 가슴을 쓸어 내렸다.

반면 막판까지 퇴출판정을 놓고 진통이 계속된 일부 기업의 직원들은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졌다. B기업 P차장은 “친구들로부터 ‘안부’ 전화를 하도 많이 받아 전화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라고 하소연했다.

한 중견그룹 임원은 “대학 합격자 발표도 아니고 수십개 기업의 운명이 걸린 결정을 꼭 이런 식으로 해야 하느냐”며 씁쓸해했다.

▽“힘없는 회사만 당한다” 불만〓C기업의 H팀장은 “우리 회사가 퇴출 0순위로 거론된 것은 ‘정치적 배경’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98년 워크아웃(기업개선작업)에 들어간 뒤 강도 높은 구조조정을 단행해 직원을 3분의 1가량 줄였고 사업매각에 적극 나섰는데도 퇴출대상이 된 것은 특별한 지역적 연고가 없어 ‘희생양’으로 적합하기 때문이라는 주장.

퇴출심사가 한달 이상 진행되면서 해당업체들은 직원들의 동요는 물론 해외거래선 이탈 등으로 인해 영업에 심각한 타격을 받고 있다. 한 상선회사의 S부장은 “많은 해외 거래업체가 수시로 전화를 걸어 ‘왜 자꾸 거론되느냐. 진짜 퇴출 되는 것 아니냐’고 꼬치꼬치 캐묻는다”며 “다른 곳으로 물량을 돌리려는 거래선을 만류하느라 다른 업무에는 신경을 못쓰는 실정”이라고 말했다.

<박원재·하임숙기자>parkw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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