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시침체 심층분석]금융구조조정 지연 투자 발목 잡아

  • 입력 2000년 5월 18일 19시 29분


‘경제 기반(펀더멘털)은 IMF체제이전에 비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는데도 주가가 IMF체제수준을 밑도는 이유는 무엇일까.’

주식시장이 호전되기는커녕 주가하락폭이 계속 확대되자 증시기반의 붕괴를 우려하는 목소리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겹친 불안요인들〓주식시장이 과매도 국면으로 들어간 것은 4가지 불안요인이 동시다발적으로 발생한 결과라는 분석. 즉 수급불안 및 금융구조조정과 관련한 정책불신으로 증시분위기가 흉흉한 가운데 해외 금융시장 및 경기불안요인이 겹치면서 연일 투매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우선 경기하강을 염려하는 시그널은 여러 경로를 통해 피부로 감지되고 있다. 제조원가에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유가는 배럴당 30달러선에 육박하면서 기업의 수익성을 악화시킬 것으로 우려되고 있다. 무역수지는 지난 4월까지 누적 흑자규모가 9억7000만달러로 작년 동기(70억9000만달러)의 13.6% 수준에 불과하다.

경상수지 악화는 원달러 환율의 상승(원화가치 하락)을 초래, 더이상 환차익을 기대할 수 없게 된 외국인들의 한국시장 이탈을 가속화할 수 있다. 또 임금인상 압박이 심해지면서 물가와 금리 인상을 자극할 가능성도 높다. 리젠트자산운용 이원기사장은 “경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단지 수급불균형과 구조조정문제 때문에 주가가 IMF수준으로 폭락할 순 없다”며 “일각에선 이번 경기순환의 정점이 빠르면 올 3·4분기, 늦어도 내년초라는 시각이 있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다른 시각도 있다〓굿모닝증권 이근모전무는 “인도네시아 태국의 금융불안은 경제적 요인보다는 정치적 요인이 야기한 측면이 강하고, 97년에 비해 경제여건이 대폭 개선된 우리나라에 전파될 가능성은 크지 않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재 증시침체에도 불구하고 외국인들의 이탈 가능성이 감지되고 있지 않다는 점을 근거로 제시했다.

최근 모건스탠리 보고서도 “한국은 펀더멘털상 이미 세계 주요 경제주체로 인정받을 만큼 성숙했다”면서 동남아 국가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해결의 실마리는 신속한 금융구조조정〓4가지 불안요인중 정책불신과 수급불안은 ‘신속하고 효과적인 금융구조조정 청사진’을 통해 해소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중론. 현재 국내 금융시스템은 투신권이 부실해지면서 자금순환의 고리가 완전히 끊긴 상태.

미래에셋 박현주 사장은 “투신권에서 빠져나와 일부 우량은행으로 유입된 시중자금은 실물부문으로 공급되기는커녕 우물처럼 고여 있는 상태”라며 “자금이동이 중단된 상황에서 ‘기업실적호전’이라는 재료는 투자자들에게 더 이상 호재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결국 정책당국이 신속한 처방전(구조조정 청사진)제시를 미루고 ‘양호한 펀더멘털’ 타령만 늘어놓는다면 지금은 경제기초여건이 건실하더라도 언제 누수(漏水)가 발생할지 장담할 수 없다는 지적이다.

박현주 사장은 “수급불균형 문제도 금융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면 얼마든지 해소할 수 있다”며 “신속한 금융구조조정만이 금융시스템을 복원하고 침체장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이라고 강조했다.

KTB자산운용 장인환사장도 “금융구조조정이 기대와는 다르게 더디게 진행되면서 투자자들의 실망이 커지고 있다”며 “여기서 지체한다면 증시로의 자금유입은 요원하고 자금의 부동화 현상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강운기자> kwoon90@donga.com

▼외국계증권사의 시각▼

외국증권사 관계자들이 국내증시와 경제상황을 보는 눈은 냉정하다.

이들은 최근 증시폭락의 원인이 자금 이탈, 수급여건 악화 등 증시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금융 및 기업 구조조정 작업의 지연과 왜곡, 무역흑자 축소 등 경제여건 악화와 닿아있다고 보고 있다.

몇몇 외국증권사 관계자들은 “지난주부터 국내에서 영업 중인 외국 은행이나 증권사에 한국 사정을 물어보는 외국인투자자들의 전화가 많이 걸려오고 있다”고 전했다.

유럽계 증권사의 금융업종 담당 애널리스트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마쳤다’고 주장하던 정부가 제2금융 및 기업구조조정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까지는 좋으나 부실 규모가 정확히 얼마인지, 구조조정 재원은 얼마나 더 필요한 지를 밝히지 않고 시간만 끌고 있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지적했다.

미국계증권사 조사담당 임원은 “현대투신 문제로 투신권 부실이 빙산의 일각이나마 드러나고 현대그룹 ‘왕자의 난’ 등으로 재벌개혁도 실패했다는 인식이 퍼져 있어 기업 스스로 자발적인 구조조정에 나서든지 정부가 강제로라도 밀어붙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나 기업은 아직도 대우사태 초기처럼 ‘문제 부인(否認) 단계’에 머물러 있다”고 비판했다.

이에 따라 외국인투자자들에게 ‘한국은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할 능력이 없어 보인다’는 인상을 줘 위기상황을 자초할 수도 있다는 지적.

한 외국증권사 영업직원은 “외국인투자자들이 아직은 눈치를 보면서 한국증시에 머물고 있지만 누군가 도저히 희망이 없다는 판단을 하고 먼저 떠나면 모두 양떼처럼 움직일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철용기자> lc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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