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빅딜 그후…中]성과주의-아웃소싱시대 개막

  • 입력 1998년 12월 8일 19시 49분


빅딜에 대한 두가지 시각이 있다.

하나는 ‘내용에 비해 너무 많은 관심과 시간을 빼앗겼다’는 것과 ‘빅딜이 몰고올 기업 내면의 대변혁과 그 과정에서 불거질 후유증을 감안하면 돌다리도 한번 더 두드려보는 접근이 아쉬웠다’는 대조적 관점이다.

사람 몸의 장기이식에 앞서 예상되는 거부반응을 세심하게 체크하듯 빅딜에도 이질적인 그룹간의 ‘화학적 융합’이 고려됐어야 한다는 논리다.

재벌개혁을 바라는 국민적 열망을 밑거름 삼아 급진전된 5대재벌 빅딜이 원만히 ‘윈―윈’게임으로 정착되기 위해선 아직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산업 진입장벽이 높아졌다〓국내총생산의 절반을 차지하는 5대 재벌의 빅딜을 계기로 산업지도를 새롭게 그릴 수밖에 없게 됐다. 재계는 중복과잉 투자가 그룹별 주력업종 선정이라는 양상으로 해소되면서 적어도 현 정권에서는 사실상 유망사업 신규진출이 불가능해졌다고 평가한다.

발전설비의 경우 80년대 신군부에 발전설비 업체(현대양행)를 반강제로 빼앗겼던 현대는 다시 발전분야에 명함을 내밀기까지 근 15년이 걸렸다. 조만간 한국중공업에 발전설비를 이관하면 비록 사업성이 좋고 합리적인 차입계획을 가지고 있어도 상당기간 이 분야 진출은 엄두를 내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민간경제연구소 관계자의 상당수는 “이번 빅딜로 한국기업들은 국제시장의 영원한 종속변수에 머물 공산이 커졌다”고 경고한다. 기술 열세와 축적자본의 한계 때문에 외국 초우량업체의 주변부를 맴돌기 십상이라는 지적.

앞으로는 반도체처럼 한국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업종을 발굴해내기가 힘들어졌다는 하소연이다.

▼‘성과주의’가 기업문화를 지배한다〓기업컨설팅 전문가들은 “몸집 불리기 경쟁이 사실상 종막을 고하면서 기업 내부에는 급속하게 ‘성과 중시’경영이 정착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80, 90년대를 풍미했던 ‘매출중시형’ 체제와 ‘외형중시형’ 경영진이 더이상 발붙일 곳이 없다는 것.

구본무(具本茂)LG회장은 최근 그룹 임원세미나에서 “어떤 경영조건에서도 수익을 내야 한다”며 “금융비용도 감당하지 못하는 사업은 무조건 철수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부실사를 우량사가 먹여살렸던 ‘부실의 도미노’를 용인하지 않으려는 포석.

성과 지상주의는 임직원 급여 등 보상체계에 이미 적용되고 있다. 지난해 금융기관에서 시작된 연봉제 붐은 IMF시대 들어 대기업에 급속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

상대적으로 ‘철밥통’을 자랑했던 5대 재벌 임직원들도 성과에 따라 언제든지 ‘블랙리스트’에 오를 수 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올 2월 정리해고가 합법화된데다 현대자동차 노사분규로 물꼬를 트면서 고용조정은 근로자들에게 발등의 불이 됐다.

전경련 관계자는 “몸집경쟁 시대의 ‘직급 인플레’현상도 기대하기 어려워질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전망한다. 내실경영에 몰두하다 보면 계열사 확장을 멈추게 되고 자연스레 위에서 아래로 인사적체가 심해질 것이란 전망. 나이와 직급이 역전되는 인사고과도 지금보다 더욱 흔한 일이 될 수 있다.

▼‘선단(船團)에서 아웃소싱으로’〓5대 그룹이 올 10월까지 분사(分社)로 떨어낸 사업단위는 3백36개. 8일 공개된 대우그룹의 2000년까지의 분사대상 사업부문도 1백5개에 달한다.

소그룹 통합으로 덩치가 커질 주력사들은 물론 비주력업종들도 이미 ‘분사 사정권’에 들어갔다. 핵심사업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데다 당장 고용조정의 부담을 지지 않는다는 장점 때문.

선단경영에 익숙한 국내 기업들의 아웃소싱 활용도는 40%대로 미국(90%) 일본(77%)기업에 비해 매우 낮다. 그것도 대개 회사경비 등 시설관리에 치우쳐 있다는 게 현대경제연구원의 분석. 앞으로 국내 재벌들은 경비절감과 외부전문성을 살리기 위해 아웃소싱 시장에 대한 의존도를 높여갈 것이 확실하다.

기업경영컨설팅사 임원은 “아웃소싱 시장이 확대될수록 기업내 ‘전문성’이 화두로 등장할 것”이라며 “막연한 조직 충성심이 자리를 보장했던 시대는 가고있다”고 경고했다.

▼재벌 임직원들,‘정체성(正體性)’위기〓몸통을 자르고 맞바꾸는 과정에서 5대재벌 임직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은 급속히 무너져내리고 있다. 업계 1위를 목표로 강한 연대의식을 보였던 ‘삼성맨’ ‘대우맨’들이 구조조정의 파고에 휩쓸리면서 가치혼돈 현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주력업종에서 제외됐거나 계열분리 후 사실상 외국기업체에 편입하도록 방침이 굳어진 빅딜대상 사업부문에서 정체성 혼란이 두드러진다.

삼성자동차의 경우 노사협의회 등을 중심으로 원상회복희망자를 접수하고 있지만 모두가 삼성그룹에 남는다는 보장은 없다.

대우그룹 관계자는 “무쇠처럼 일했던 직원들이 다른 그룹으로 적(籍)을 옮기거나 분사대상이 될 경우 겪는 정신적 혼란과 상실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고 말하고 “직원들은 회사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할지, 따로 자기길을 준비해야 할지 갈림길에 서 있다”고 평가했다.

‘무노조 조직’을 자랑해온 삼성그룹은 비교적 강성노조를 두고 있는 대우전자가 그룹에 편입되는 것에 벌써부터 신경을 쓰고 있다. 한 관계자는 “노사갈등이 첨예해질 경우 전자소그룹 전체의 사내 분위기가 흔들릴까봐 걱정스럽다”고 말했다.

〈박래정기자〉ecop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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