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시대 고달픈 샐러리맨 백태]

  • 입력 1998년 5월 3일 19시 32분


판매현장에 내몰리는 연구원들, 단 1분이라도 지각시 인사고과 반영, 맞벌이한다는 말도 맘놓고 하지 못하는 분위기….

IMF 시대의 직장이 이렇듯 살풍경해졌다. 그래도 불평하는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다. 살아남기 위해선 철저한 프로로 변신하는 수밖에 없다는 것을 샐러리맨 스스로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팍팍해진 직장〓얼마전 과 부장급의 명예퇴직을 실시한 K기업. 신청자가 아무도 없자 3명이 정리해고당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3명 모두 평소 지하 탁구장에서 자주 어울리던 탁구장 멤버들. 이 일이 있고나자 점심시간이면 빈 자리가 없었던 탁구장을 찾는 발길이 뚝 끊겨버렸다.

“탁구장에 들락거리는 모습이 상사들 눈에 띄면 좋을 게 없다”는 인식이 퍼진 것.

D증권에는 요즘 출근하기 무섭게 사원증을 가슴에 다는 직원이 많아졌다. IMF 이전엔 회사측이 그렇게 ‘사원증을 달자’고 캠페인을 벌여도 ‘창피하다’며 꿈쩍않던 직원들이었다.

주말 직무교육도 마찬가지. 직급별로 실시하는 보충교육 등을 가급적 노조의 반발을 고려해 주중 업무시간에 했지만 요즘엔 일요일에 실시해도 군말이 없다. 물론 특별한 사유를 제외하곤 전원 출석이다.

인터넷서비스업체인 H사. IMF시대 들어 전 조직이 서비스상품 판촉에 매달리고 있다. 처음엔 ‘우리가 판촉사원이냐’고 볼멘소리를 하던 직원들도 차츰 실적경쟁에 신경을 쓰는 눈치. 일반 연구원들에게도 할당 판매목표가 떨어졌고 주말엔 판촉 보고서도 작성한다.

웃지못할 일도 많이 벌어진다. 광고회사 직원 S씨(34·여)는 “지난해 말부터 대대적인 인원감축에 들어가면서 ‘우는’ 소리 하는 직원들이 부쩍 많아졌다”고 말한다.

이를 테면 “우리집에는 노모가 편찮으시고 나밖에는 돈버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고 다니는가 하면 부인이 맞벌이 하고 있으면서도 “집사람은 이미 직장을 그만 뒀다. 내가 잘리면 가정이 풍비박산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고.

▼프로가 돼야 살아남는다〓작년말 감원의 칼바람을 피한 무역회사 대리 K씨(34)는 “여차하면 회사를 그만 두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아내의 만류로 마음을 고쳐먹은 그는 철저한 ‘회사인간’이 되기로 독한 결심을 했다. “회사를 나가 독립해도 어려운 건 마찬가지. 기왕 회사에 남을 거라면 능력을 보여줘 이사까지 올라가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그래서 맨먼저 시작한 일이 조기출근. 출근하는 데 2시간 가량 걸리는 의정부에서 회사 부근인 마포로 이사까지 했다. 요즘 그는 자기 부서에서 가장 이른 7시경이면 회사에 나와 경제 관련 신문기사를 스크랩해 자신의 파일을 만들고 있다. 전문지역을 하나 개척하기로 하고 미개척지인 아프리카 지역 국가들에 대한 공부도 하고 있다.

대학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은행원 최모씨(30). 대학 때 전공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았던 그는 최근 책꽂이 구석에 처박아뒀던 프랑스어 교재를 다시 읽고 있다.

또 위에서 시키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리포트 하나를 작성했다. 프랑스계 은행의 운영 시스템 등을 파악해 ‘외국은행에서 배울 점’이라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이런 노력들이 쌓이다보면 자신을 ‘프랑스 전문가’로 인정, 쉽게 내몰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서다.

〈이명재·금동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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