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정원에서 떠올린 오래된 질문들[김선미의 시크릿가든]

  • 동아일보
  • 입력 2026년 7월 4일 10시 54분


충남 공주 나태주풀꽃문학관

충남 공주시 반죽동 나태주풀꽃문학관에서 자신의 시(詩) 앞에 선 나태주 시인. 2014년부터 손수 가꾼 ‘시인의 정원’에는 풀꽃들이 가득하다.
충남 공주시 반죽동 나태주풀꽃문학관에서 자신의 시(詩) 앞에 선 나태주 시인. 2014년부터 손수 가꾼 ‘시인의 정원’에는 풀꽃들이 가득하다.
《충남 공주 나태주풀꽃문학관의 오래된 담에는 주황빛 능소화가 한창이다. 나태주 시인이 지난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담쟁이가 세계지도를 그린다”고 말했던 바로 그 담이다. 능소화 한 그루는 담장 속에서 솟아났고, 다른 한 그루는 이웃집 쪽에서 담을 넘어와 초록빛 담쟁이와 어우러진다.

시인에게 능소화는 어떤 꽃인지 물었다. “철없는 누이동생 같아요.” 이유를 묻자 시인이 말했다. “여름에 철없이 피잖아요. 대책 없이 입 벌리고 웃고 있다가 때가 되면 그냥 툭 떨어지죠. 그래서 무상하고 슬픈 꽃이에요.”

시인은 직접 쓴 시 ‘능소화’를 들려주었다.》

●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잡초일까



‘시인의 정원’과의 만남은 공주 제민천 나태주 골목길의 철학 서점 ‘오래된 질문’에서 비롯됐다. 마당에 미로처럼 세워진 가벽과 잔잔한 꽃들 사이를 지나 서점에 들어서자 나태주 시인의 ‘감사-네가 세상에 있어서’라는 향기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책장 사이로 숲의 향이 퍼지면서 서점 이름처럼 오래된 질문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서점의 지명훈 대표가 말했다. “나태주 시인이 마침 문학관에 계시네요. 거기 정원이 참 좋아요. 함께 가 볼래요?” 나태주 골목길을 따라 260m쯤 걸었더니 문학관이 나왔다. 양동이를 들고 허리를 굽혀 풀을 뽑고 있는 시인의 뒷모습이 보였다. 일손을 도와 보려고 풀숲에 발을 들여놓던 순간, 시인이 돌아보며 말렸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잡초처럼 보여도 실은 귀한 꽃일 수 있어요.”

나태주풀꽃문학관은 1930년대 일본식 가옥을 고쳐 2014년 문을 열었다. 공주시가 조성해 운영하는 이곳에는 지난해 7월 현대식 신관도 들어섰다. 하지만 시인의 손길이 짙게 밴 곳은 옛 문학관 주변 정원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로 시작하는 시 ‘풀꽃’을 쓴 시인이 방문객들에게 실제 풀꽃을 보여주고 싶어 이 정원을 손수 가꿔 왔다.

봄까치꽃.
봄까치꽃.
5월에 봤던 시인의 정원은 정말로 풀꽃들의 세상이었다. 두해살이풀인 구슬붕이는 조그만 보석을 박은 반지 같았다. 우리나라 물망초인 꽃마리와 봄까치꽃도 있었다. 누군가에게는 밟고 지나가는 잡초일지 몰라도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예쁜 야생화였다. “그런데 아세요? 민들레도 꽃이 피면 눈에 띄어 뽑혀요. 내가 여기 있다고 손 들고 자랑할 때가 위험해요. 사람도 잘 나갈 때 고개 숙이고 조심해야 합니다.”

구슬붕이.
구슬붕이.
작약.
정원에는 산사나무, 자귀나무, 병꽃나무, 작약, 독일붓꽃처럼 화사한 식물뿐 아니라 장구채와 꿀풀처럼 소박한 식물도 저마다의 속도로 자라고 있었다. “땅을 향해 겸손하게 피는 건 땅나리, 하늘을 향하는 건 하늘말나리예요.” 시인은 꽃 이름도 하나씩 알려 주었다.

꿀풀.
독일붓꽃.
독일붓꽃.
시인은 정원에서 한시도 쉬지 않았다. 박완서 소설 제목으로 익숙한 싱아도 문학관 주변에 많이 자라 있었다. 시인은 싱아를 연신 뽑으며 말했다. “싱아랑 댕댕이덩굴은 보이는 대로 뽑아야 해요. 그런데 재밌는 게 뭔지 아세요? 꽃들도 살라는 데에 안 살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 살아요. 중요한 명제입니다. 저 뒤 담장 위에 구절초를 많이 심었는데, 위에서는 죽고 밑에 와서 살더라고요. 살려고 뛰어내리는 거예요.”

● 어떻게 기다려야 꽃이 필까

돌나물꽃.
돌나물꽃.
정원에는 손톱 크기 노란색 꽃이 무리 지어 피어 있었다. 초록 하늘에 핀 별들 같았다. 김치를 담가 먹거나 어린 순을 나물로 무쳐 먹는 돌나물이었다. 시인은 말했다. “돌나물이라고 함부로 보면 안 돼요. 기다려야 해요. 이렇게 꽃이 예쁘게 필 때까지.”

땅속에 남은 씨앗이 몇 년 만에 고개를 내민 금낭화도, 하얗게 피어난 연잎꿩의다리도 기다림의 결과였다. 그런데 식물을 기다리는 일은 사람을 기다리는 일과도 닮았다. 시인은 부모의 자세를 이야기했다. “아이들도 어른이 될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해요. 부모 노릇은 낳아 주고 길러 주고 가르쳐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아요. 기다리고 참아 주고 결국 져 주기까지 하는 겁니다. 나도 우리 딸(나민애 문학평론가)에게 져 주는 과정에 있어요. 걔가 나보다 베스트셀러를 많이 낼 때까지 기다리는 거죠(웃음).”

시인은 자신의 시에 고승하 작곡가가 곡조를 붙인 노래 ‘풀꽃’을 오래된 풍금을 치며 불렀다. 풍금 위에 놓인 딸의 사진이 유난히 애틋해 보였다. 문틀에 달아 놓은 풍경은 바람결을 만나 맑은 소리를 냈다.

시인은 예전처럼 시를 많이 쓰지 않는다. 그저 시가 찾아오기를 기다린다. 정원은 시인뿐 아니라 이곳을 찾는 사람들의 속도도 바꾸었다. 문학관 주변에 디딤돌을 한 바퀴 깔아 두었더니 사람들 발걸음 소리가 달라졌다고 한다. 시인이 쓴 시 ‘디딤돌’에도 고스란히 이 이야기가 담겨 있다. ‘꽃이 피기 시작하니/사람들 발걸음 소리가/달라졌다/빠르게 저벅저벅 발걸음 소리/느리게 자박자박/발걸음 소리로 바뀌었다’ 시인의 정원은 곧 살아 있는 시집이었다.

● 정원은 어떻게 인생을 바꿀까

오래된 도시 공주에는 예로부터 ‘춘마곡(春磨谷) 추갑사(秋甲寺)’라는 말이 있다. 봄에는 마곡사 신록이, 가을에는 갑사 단풍이 아름답다는 뜻이다. 시인과 제민천을 향해 걷다가 골목길에 놓인 브룬펠시아 화분을 만났다. 시인은 말했다. “이 꽃 영어 이름이 ‘예스터데이, 투데이 앤드 투모로’예요. 꽃이 어제는 보라색이었다가 오늘은 하얀색으로 바뀌거든요. 시간이 흐르며 꽃 빛깔은 달라지지만, 우리는 그 모든 시간을 품고 한 나무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지요.”

시인은 정원을 가꾸며 삶에 여유가 생기고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했다. 문학가 헤르만 헤세가 뒤늦게 정원 가꾸기와 그림 그리기에 몰입했던 것처럼. “헤세에게 그림은 휴식이었을 겁니다. 휴식에서 가장 중요한 건 몰입이고, 몰입은 나를 잊는 시간이지요. 시를 쓸 때도 몰입할 수 있지만, 거기에는 ‘잘 쓰겠다’는 목적과 욕심이 들어가기 쉬워요. 반면 정원은 큰 목적이 없어요. 그저 살아 있는 생명에게 잘해줘야겠다는 마음뿐이지요. 정원 일은 경쟁심에서 해방되게 합니다. 젊은 친구들도 정원에서 꽃을 보며 좀 거닐었으면 좋겠어요.”

시인의 정원을 나서며 정밀아의 노래 ‘꽃’을 절로 흥얼거렸다. 시인의 시 ‘꽃 3’에 곡을 붙인 노래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소중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런 것’…. 무엇이 꽃이고 무엇이 잡초인지, 어떻게 기다려야 꽃이 피는지, 정원은 어떻게 인생을 바꾸는지 평소 품었던 오래된 질문들에 대한 답은 멀리 있지 않았다. 자세히 보고, 오래 기다리고, 마침내 져 줄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나태주 시인은…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너도 그렇다’는 시 ‘풀꽃’이 널리 사랑 받으며 ‘풀꽃 시인’으로 불린다. 1971년 등단 이래 시집을 위주로 250여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시인협회장과 공주문화원장 등을 지냈으며 소월시문학상과 정지용문학상을 받았다. 충남 서천에서 태어나 공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3년 간 교단에서 가르쳤다. 충남 공주에 그의 이름을 딴 나태주풀꽃문학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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