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병오년도 벌써 두 달이 다 지나고 있습니다. 혹시 올해도 ‘책을 열심히 읽겠다’고 다짐하셨다가 작심삼일에 그친 분들이 계신가요. 2026년 101주년을 맞은 동아일보 신춘문예의 당선 작가들에게 ‘인생 책’이 무엇인지 물어봤습니다. 분야별 당선자들이 인생 책과 추천 사유, 책 속 한 문장을 정리했습니다. 신춘문예 작가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책들을 함께 펼쳐 보면 어떨까요.》
이형초 / 시 당선자
◇사물의 뒷모습/안규철 지음·현대문학
좋은 글이란 작가만의 고유한 ‘사유’가 책의 전면에 단단히 자리하고 있는 작품일 것이다. 이 책은 사물과 형상, 그리고 자신의 삶을 향한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사유를 담아낸 에세이집이다. 그림과 글이 함께 어우러지며 우리가 무심히 지나쳐 온 사물의 이면을 조용히 들여다보게 한다.
특히 3장 ‘모든 것이면서 아무것도 아닌 것’에선 우리가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했다고 믿는 순간조차 실은 그 일부만을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풀어낸다. 세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역설적이며, 익숙하다고 여겼던 장면들 역시 낯선 얼굴을 숨기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세상의 벽과 부딪힐 때마다 이 책을 다시 꺼내 든다. 내가 보았다고 믿은 것들은 실은 제대로 본 적이 없었고, 있다고 여긴 자리에는 실제로 서 본 적이 없었다는 문장을 되새긴다. 그 사실을 인정하고 마주하는 순간 삶은 이전과는 다른 깊이로 열리기 시작한다.
● 책 속 한 문장 “우리는 우리가 본다고 생각한 것을 실제로 본 적도 없었고, 있다고 생각한 곳에 실제로 있어 본 적도 없었다.”
김순호 / 시조 당선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마거릿 미첼 지음·안정효 옮김·열린책들
소설을 읽기 시작한 계기가 영화 관람의 감동 때문이었다. 내 생애 첫 영화이자 첫 소설책이다. 1800년대 중후반 미국의 남북전쟁과 노예 해방, 이후 이어지는 남부와 북부의 갈등,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한 스칼릿 오하라의 사랑과 성장을 다룬 작품이다. 작가 마거릿 미첼이 1936년에 쓴 장편소설로 이듬해인 1937년에 퓰리처상을 받았고, 1939년에 영화로 제작됐다.
영화에서 느낀 장면이 오버랩되면서 시종 흥미진진하게 읽었고, 거기서 미처 다루지 못한 디테일과 여백을 채워 넣으며 몰입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영리하고 고집 센 남부의 미녀 스칼릿 오하라, 그녀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생존하려는 강한 의지를 지닌 인물이다. 미국의 아픈 역사인 남북전쟁을 바라본 인간의 욕망과 생존 본능을 이렇게 생생하게 그려낼 수 있을까 느끼며 여러 번 읽었다. 전쟁의 시작, 생존과 재건, 사랑과 갈등, 비극과 이별 그녀의 파란만장한 인생 이야기는 아직도 왜소해지려는 내 자아를 자주 각성시키고 있기에, 그 영향은 현재진행형이다.
● 책 속 한 문장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거야.”
박혜겸 / 희곡 당선자
◇동승/함세덕 지음·지만지드라마
나는 자주 사람들의 마음이 두렵다. 그들이 품은 어떤 분노는, 그리움은, 억울함은 도무지 막아설 수 없기 때문이다. 고 함세덕 작가의 ‘동승’에는 그런 심지를 품은 아이, 도념이 등장한다. 그리고 도념의 심지가 언제 활활 타오를지 몰라, 불이 붙을 만한 거라곤 모조리 싹을 자르는 주지가 그 옆에 있다. 도념은 절을 떠나며,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구멍에다 뫄둔 것을 제가 아침에 몰래 꺼내 뒀었어요. …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라고 말한다.
희곡을 다 읽고 나면 도념이 두고 간 잣을 오독오독 깨물어 씹는 주지가 떠오른다. 평소라면 작은 목숨의 겨우살이에 손을 대었다고 날뛰었겠으나, 그날만큼은 그것을 꼭꼭 짓이겼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도념이 짓이겼을 응어리를 한 알 한 알 삼키며, 자신이 결국 어찌할 수 없었던 열망을 헤아려 보았을 것이다. 마침내 도념이 응어리를 활활 불태우며 절을 떠날 때, 희곡을 읽는 내내 품어온 두려움은 슬픔으로 바뀌고 만다. 자신의 마음도, 타인의 마음도 어찌할 수 없는 우리는 두려운 것이 아니라 유약한 것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 책 속 한 문장 “스님, 이 잣은 다람쥐가 겨울에 먹으려구 등걸구멍에다 뫄둔 것을 제가 아침에 몰래 꺼내 뒀었어요. 어머니 오시면 드릴려구요. 동지섣달 긴긴 밤 잠이 안 오시어 심심하실 때 깨무십시오.”
배은정 / 중편소설 당선자
◇아침의 피아노/김진영 지음·한겨레출판사
철학자 김진영이 암 선고를 받은 뒤, 임종 사흘 전까지 13개월 동안 쓴 기록이다. 그동안 읽고 생각하고 말해 온 삶을 증명하듯, 일상을 ‘열심히 구경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오류의 습관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려 했다.
고요의 말, 조용히 외로운 것들, 감정이 아닌 정신으로서의 사랑, 생의 명랑성을 지닌 우렁찬 목청, 사랑과 아름다움과 감사에 대해서 말하기를 멈추지 않기. 철학자가 끝까지 붙든 삶의 태도 앞에서 묻게 된다. 생의 마지막 순간, 나는 무엇을 증명할 수 있을까.
가족이 입원한 병원 서점에서 이 책을 샀다. 퇴원 후에도 마음이 거칠어질 때마다 책을 펼쳤다. 심란할 때는 생각을 가라앉히는 차 한 잔이 되었고, 자기 연민에 기울 때는 정신을 세우는 죽비가 되었으며, 숨이 가쁠 때는 속도를 늦추는 고삐가 되어 주었다. 정갈한 문장은 정신을 맑게 했다. 사이사이 드러나는 연약함에서는 위로를 얻었다.
저자가 세상을 떠난 지 7년이 지났다. 여러 권이 더 나왔지만, 모두 이 책의 주석서처럼 느껴졌다.
● 책 속 한 문장 “글을 어떻게 쓰는 건지도 알겠다. 그건 백지 위에 의미의 수사를 채우는 일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 마침표처럼 정확하게 음표를 찍는 일이다.”
김근희 / 단편소설 당선자
◇디어 라이프/앨리스 먼로 지음·정연희 옮김·문학동네
이 단편집을 이야기할 때면 늘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저자가 ‘현대 단편 소설의 거장’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그런 거장의 마지막 책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더 본질적이다. 단편 예술의 극치가 이 책에 담겨 있어서다.
책은 열네 편의 단편 소설을 수록하고 있다. 캐나다의 시골을 배경으로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이런 문장만으로는 이 단편들이 가진 서늘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 이야기 안에는 보통 많은 것들이 숨겨져 있기 마련인데, 여기 담긴 단편들에는 그보다 더 많은 것이 숨어 있다. 단편을 읽다 보면 우리의 인생이 떠오른다.
지나간 것에 대한 곱씹음과 숙고를 거쳐 간신히 닿을 수 있는, 가냘프지만 의미로 충만했던, 우리의 인생. 어쩌면 너무 호들갑처럼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인생 책’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는 없다. 만약 평생 단 한 권의 책만을 읽어야 한다면 주저 없이 이 책을 읽고 싶어서다. 마지막 책으로 오기까지 작가가 보낸 시간과 삶을 책 한 권으로 읽을 수 있다면 얼마나 축복일까. 책 제목이 ‘디어 라이프’인 이유를 모두가 알았으면 좋겠다는 소망이다.
● 책 속 한 문장 “사랑에 관한 한 정말로 변하는 것은 없다.”
최승연 / 동화 당선자
◇숨결이 바람 될 때/폴 칼라니티 지음·이종인 옮김·흐름출판
일에 치여 하루를 보내다 보면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까먹곤 한다. 부모님 안부 전화를 미루고, 좋아하는 작가의 신작 소설은 간신히 첫 장만 들춰 본다. 소중한 이들이 영원히 곁에 머물 거라는, 언젠가 좋아하는 것을 마음껏 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현재는 그저 미래로 건너가기 위한 사다리가 된다.
이 책은 젊은 의사 폴 칼라니티가 암 선고를 받고 2년 동안 써 내려간 수필집이다. 폴은 시리도록 아름다운 문장들을 엮어 삶과 죽음에 대한 자신의 태도와 각오를 담담하게 서술해 나간다. 청년 시절 느꼈던 막연한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폴은 마침내 죽음 앞에서 의사가 갖추어야 할 태도를 완성해 낸다. 암 선고를 받고 환자가 된 뒤에도, 폴은 의사로서 정체성을 지켜 나가기 위해 노력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게 아니므로, 그 앞에도 분명 삶이 존재하므로 폴은 좌절하지 않고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만 집중한다. “점심시간 이후의 미래를 생각하는 건 시간 낭비다”라는 폴의 말처럼 미래는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에 일상을 사랑하는 것으로 가득 채우고, 행복을 미래로 미루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삶은 유한하므로.
● 책 속 한 문장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곽경선 / 시나리오 당선자
◇소설 윤동주/최인수 지음·집문당
자극적이고 휘발되는 말과 영상에 피로가 몰려올 때, 문득 찾게 되는 고요가 있다. ‘소설 윤동주’는 한 사람의 삶과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고요한 내면과 마주하게 하는 책이다.
일제강점기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조용히 말의 씨를 심고 키워내며 마침내 영원한 꽃을 피워 낸 시인이었다. 소설 속 그는 특별한 영웅이 아니다. 내성적이고 문학과 자연을 사랑했던 곧은 성품의 청년이었다. 말과 글을 빼앗긴 시대에 문학을 선택한 그는 깊은 정적 속에 서 있는 사람처럼 보인다. 사랑을 배우기 전 민족의 아픔을 먼저 자각했고, 닿을 수 없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암울한 세상에 한 줄기 빛이 스며들길 꿈꾸었다. 맑고 영롱한 시를 쓰고자 했지만, 냉혹한 시대의 벽 앞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혐오하며 객혈처럼 시를 토해냈다. ‘소설 윤동주’는 저자가 윤동주의 주변 인물들을 만나 채록한 기록을 바탕으로, 젊은 동주의 삶을 풀어낸 소설이다.
수많은 글과 영상이 난무하는 오늘날, 한 청년의 삶과 시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성찰해야 하는지, 무엇에 저항해야 하는지, 그리고 무엇을 부끄러워해야 하는지 말없이 자문하게 한다.
● 책 속 한 문장 “만 27년 1개월 동주가 지향해 온 지순한 세계의 도달점은 하늘이었다.”
박지민 / 문학평론 당선자
◇사랑의 지혜/알렝 핑켈크로트 지음·권유현 옮김·동문선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읽고도 왠지 모를 철학적 허기가 남아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한번 뒤적거려 보길 권한다. 이 책은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한 철학자의 생각에 대한 해설로, 사랑이란 주제에서 시작해 철학 역사 정치 종교 등을 종횡무진 횡단한다. 무엇에 대한 사랑이든, 사랑에 몰두하는 사람이라면 그 대상을 다 알 것만 같은(혹은 다 알아야만 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러나 “사랑이 지혜의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이 책의 말을 곱씹어 보면, 비판과 반성을 멈추는 것이 반지성주의이듯 타자를 다 알았다고 확신하는 것 역시 반사랑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인생 책’이란 걸 정하기엔 나는 너무 인생을 모른다. 그러나 사랑이 내 인생을 일궈 나가리란 예감 자체는 언제나 나에게 있다 말하겠다.
● 책 속 한 문장 “실제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를 분리시켜서, 나에게 오디세우스의 모험담과는 다른 모험담을 알려 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타인의 얼굴뿐이다. (…) 만약 이 무력감이 없다면, 삶은 아무리 엉뚱한 것일지라도 자기를 떠나 자기를 향해 가는 단조로운 여행에 불과할 것이다.”
최우정 / 영화평론 당선자
◇리어 왕/윌리엄 셰익스피어 지음·최종철 옮김·민음사
문학이 좋다는 사람을 만나면 셰익스피어를 좋아하는지 묻고, 그렇다는 답이 돌아오면 무엇을 가장 좋아하는지 묻는다. 이런 대화로 여러 인연을 얻게 됐다. 사랑과 배신, 복수와 용서, 희망과 욕망, 오슨 웰스와 구로사와 아키라를 얘기하며 말이다.
인생 책이란 우연으로 와서 필연으로 남은 책이고, 마음에 볕이 들 때나 폭풍이 몰아칠 때나 함께하는 책일 것이다. 모든 선택은 포기의 다른 이름이지만, ‘리어 왕’을 선택하는 데만은 별 망설임이 없다. 인류의 역사에 불변하는 거의 유일한 의제가 있다면 ‘인간은 외롭다’라고 생각한다. 고독과 허무를 감당치 못해서 그 숱한 폭력이 벌어졌다는 게 아니라, 인간이 서로 의존하는 취약한 존재임을 안다면 본인과 타인에게 덜 가혹할 수 있다는 뜻이다. 홀로 남은 리어는 “불쌍하고 헐벗은 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외친다. “자신을 노출시켜 가엾은 자들을 느껴라.” 매번 예상을 빗나가는 인생은 통제 불가능하지만, 눈앞의 고통에 공감하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일은 언제나 가능하다. 내게 ‘리어 왕’은 고통과 구원과 성장에 관한 가장 탁월한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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