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으로 보는 ‘가왕’ 조용필의 시간 [청계천 옆 사진관]

  • 동아일보
  • 입력 2025년 10월 11일 13시 00분


백년사진 No. 133

1989년 조용필 / MBC 제공
1989년 조용필 / MBC 제공
추석 연휴, ‘광복 80주년 특집쇼’라는 이름의 무대에 온 세대가 함께 들썩였습니다. 고척돔의 함성, TV 앞의 떨림까지 더해지며 50년 넘게 축적된 한 가수의 시간은 또 한 번 현재형이 되었습니다. 그의 인생이, 그의 노래가 지금을 살고 있는 우리의 인생을 관통하고 있는 느낌입니다.

KBS2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KBS2 ‘조용필, 이 순간을 영원히’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60대의 장노년층의 남성들이 응원봉을 들고 자연스럽게 리듬을 타는 흔치 않은 모습들이었습니다. 그의 노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 왔는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이번 주 백년사진은 동아일보 아카이브에 잠들어 있던 조용필의 장면들을 꺼내, 그의 반세기 궤적을 더듬습니다. 아카이비스트들과 기자들이 지난 50여 년간 엄선해 놓은 이미지들입니다. 가사와 리듬으로 우리의 인생을 함께 걸어온 가왕의 또 다른 흔적으로 정리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거라는 생각에서입니다.

● 세상에 첫 등장 ─ 1972년, TV ‘영 사운드’

1980년 조용필/ 동아일보 DB
1980년 조용필/ 동아일보 DB
1981년 조용필/ 동아일보 DB
1981년 조용필/ 동아일보 DB
밤 7시, 즉흥 놀이를 곁들인 젊은이 프로그램에 무명 신예가 서 있었습니다. 사회 분위기는 급변했고, TV는 시대의 신경망이었습니다. 아카이브 속 흑백 사진에서 그는 아직 ‘가왕’이 아니라, 무대의 질감을 배우는 연주자이자 보컬입니다. 이 첫 진입의 사진은 훗날 팔색조 창법으로 확장될 원형을 암시합니다.

● 금지와 비상 ─ 1977~1980년, 침잠과 컴백

대마초 파동으로 멈춘 인기(1977)의 기사 사진은, 굳은 입술과 흔들림 없는 눈빛을 보여줍니다. 그 멈춤은 곧 수련이었습니다. 1980년, ‘창밖의 여자’로의 컴백. 바이올린 선율이 흐르는 무대 사진 속 그는 한 옥타브 위에서 다시 내려와 관객의 심장에 닿습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도시 변방의 그리움을 불렀다면, ‘창밖의 여자’는 시대의 상흔에 대한 위로였습니다.

1978년 창밖의 여자 앨범
1978년 창밖의 여자 앨범


● 밀리언셀러의 손 ─ 1981~1982년, ‘창밖의 여자’와 국제무대

제작 라인을 풀가동하게 만들었다는 앨범 백만 장의 신화를 다룬 기사 옆 사진에서 그의 손은 마이크를 감싸 쥔 채 위로 당깁니다. 소리를 ‘내뿜는’ 손이 아니라 ‘끌어올리는’ 손. 1982년 도쿄 무대 사진에서는 정갈한 수트, 단정한 미소, 그리고 판소리에서 길어 올린 변성의 궤적이 빛납니다. 국경을 넘은 건 멜로디보다 태도였습니다.

1988년 무대 위 조용필 / 동아일보 DB
1988년 무대 위 조용필 / 동아일보 DB


● 왕관을 거부한 가왕 ─ 1986년, ‘상 사양’ 선언

연말 시상식의 플래시가 그에게만 집중되자 그는 미소를 띠되, 상패를 한걸음 뒤로 밀어 둡니다. “후배들의 길을 위해.” 기록은 이 순간을 “식상함의 거부”로 남깁니다. 사진 속 거절의 제스처는 조용필식 영광의 사용법이었습니다. 무대를 위해, 노래를 위해, 다음 세대를 위해 그는 더이상 상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1988년 10집 앨범
1988년 10집 앨범


● 서울, 북경, 모스크바 ─ 1988~1989년, 회색 도시에 새긴 노래

베이징 호텔 무대 사진 한 장은 공연장의 조도보다 관객의 눈동자를 더 밝게 담습니다. 같은 해 서울, 이듬해 모스크바·사할린 기사에는 ‘서울 서울 서울’과 ‘한오백년’이 공존합니다. 전인미답의 길을 그는 누구보다 먼저 지나갔습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대도시 공연을 만들어냈습니다.

● 신바람 이후의 정조 ─ 1993년, ‘서울…’의 승리

올림픽의 낙엽이 굴러가던 시절, 우울을 노래한 발라드가 뒤늦게 도시의 주제가가 됩니다. 무대 뒤 스탠드에 잠시 기댄 채 먼 곳을 보는 표정의 사진. “신바람보다 항심.” 노랫말의 낮은 파동이 사진의 정적과 겹칩니다. 소란이 지나간 자리에서 남는 건 목소리의 내구성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줬습니다. 음악과 집 밖에 모른다는 노력하는 가수의 간조로운 삶이 무대의 완성도를 높인것은 아닐까요.

1996년 무대에 선 조용필 / 동아일보 DB
1996년 무대에 선 조용필 / 동아일보 DB
● 콘서트의 문법을 바꾸다 ─ 1994~1999년, 장기공연과 오페라극장

동아일보 DB
동아일보 DB
동아일보 DB
동아일보 DB
2005년 비가 내리는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 / 이훈구 기자
2005년 비가 내리는 공연장을 가득 메운 팬들 / 이훈구 기자
2005년 비가 내리는 공연장에서 비를 맞으며 열창하는 조용필/ 이훈구 기자
2005년 비가 내리는 공연장에서 비를 맞으며 열창하는 조용필/ 이훈구 기자
호암아트홀 장기공연 포스터와 리허설 컷,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 개방 기사 사진은 대중가요와 클래식 공연장의 경계를 허무는 사건의 기록입니다. ‘대형’이 곧 ‘과장’이 되지 않도록, 그는 음향 체크에 집요한 시선을 보냅니다. 사진의 포커스는 늘 관객석까지 닿아 있습니다. 무대의 중앙에 서 있으면서도, 그는 늘 관객 쪽을 본다는 뜻입니다.

● 분단의 섬을 노래로 건너다 ─ 2005년, 평양 공연

2005년 평양 방문에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는 조용필/ SBS 제공
2005년 평양 방문에서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만나는 조용필/ SBS 제공
6·25 50주년 특별 콘서트, 그리고 평양 유경 체육관. 한반도기가 내려오는 장면에서 관객의 눈물과 기립이 사진의 화면을 가득 채웁니다. ‘꿈의 아리랑’의 합창은 플래시보다 밝았다고 누군가 말했습니다. 무대 위 조용필은 마이크를 내려놓고 관객을 바라봅니다. 이때 사진은 기록을 넘어 사건이 됩니다. 같은 노래가 두 사회를 잇는 다리였다는 사실을, 사진이 증명합니다. 2011년에는 소록도를 찾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해 노래를 불렀습니다.

2011년 5월 5일 5일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단과 국민가수 조용필씨가 전남 고흥군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졌다. 가수 조용필 씨가 한센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박영철 기자.
2011년 5월 5일 5일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영국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단과 국민가수 조용필씨가 전남 고흥군 소록도를 찾아 한센인들을 위한 연주회를 가졌다. 가수 조용필 씨가 한센인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다. 박영철 기자.


● “과거의 조용필은 잊어달라” ─ 2013년, ‘헬로’의 혁신

2013년 공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13년 공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13년 공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13년 공연.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작업실 스탠드 조명 아래, 모니터 앞에 앉은 사진. 수십 년의 습관을 덜어내고 해외 작곡가들과 협업한 19집. ‘바운스’는 박자의 경쾌함보다 표정의 가벼움을 사진으로 남깁니다.

가왕의 캐리커쳐. 최남진 기자
가왕의 캐리커쳐. 최남진 기자
선글라스 안쪽 눈빛이 웃고 있습니다. 스스로 틀을 깨기 위해, 그는 먼저 자신의 초상을 비우는 법을 배웠습니다.

2018년 기자간담회/ 동아일보 DB
2018년 기자간담회/ 동아일보 DB
2022년 조용필 공연/ 김재희 기자
2022년 조용필 공연/ 김재희 기자


● 다시 현재형 ─ 2024~2025년, 20집과 고척돔

2024년 발매된 정규 20집 ‘그래도 돼’가 이번 고척돔 컨서트에서도 포함되었습니다. 시대를 버텨나가는 청춘에 대한 응원인것 같기도 하고, 세파를 뚫고 살아온 중장년에 대한 손짓 같기도 합니다. “이제는 믿어, 믿어봐.” 고척돔 콘서트에서 흰 정장과 검은 선글라스의 대비는 여전하되, 관객의 연령대가 넓어졌습니다. 할머니가 “용필 오빠”를 외치고, 20대가 눈물을 훔칩니다. 한 무대에 공유된 서로 다른 시간들은 놀라움 그 자체입니다. 그만큼 조용필의 존재는 특별합니다.

2024년 기자간담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2024년 기자간담회.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조용필의 가사를 맹자 철학으로 해석한 논문을 발표한 홍호표 박사는 ‘킬리만자로의 표범’은 우주와 인간 본성에 대한 존재론적 고민이 발현된 노래라고 했습니다. 송호근 교수는 “대중가요이기엔 너무 추상적인 그의 노래가 대중의 가슴에 절절한 울림을 일으키는 것을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그는 뭇사람의 고해성사를 들어주는 성직자 같은 가수다. 그가 한때 흠모했다는 스페인 가수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는 세상 풍경을 경쾌하고 애절하게 바꾼다. 우리의 조용필은 마음이 따뜻한 신부(神父)처럼 비련의 주인공들에게 슬픔을 대면하라고 이른다”고 2008년 10월 28일자 신문에 찬가를 남겼습니다.

2018년 동아일보 인터뷰 / 홍진환 기자
2018년 동아일보 인터뷰 / 홍진환 기자
여러분의 인생에서 조용필은 어떤 가사로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으신가요? 좋은 댓글로 기억을 나눠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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