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얼어붙은 세상 구해줄 ‘이유 없는 다정함’에 관하여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7월 8일 03시 00분


코멘트

무엇이 우리 삶을 바꿀 수 있을까
김연수 작가 독자 만나며 쓴 소설
◇너무나 많은 여름이/김연수 지음/304쪽·1만6000원·레제

눈이 내리는 이상한 여름이다. ‘나’는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지나간 많은 여름을 생각한다. 어머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유행하던 2020년 돌아가셨다. 그리고 한참 뒤인 2063년. 세상은 얼어붙었지만 나는 여전히 여름철에 내리는 눈을 맞는다. 어머니에게 배운 다정함으로 그 계절을 견디면서.

표제작을 포함한 책에 담긴 20편의 단편소설은 다양한 배경과 화자를 담고 있다. 방공호 안에 들어간 피난민들의 이야기, 떠나버린 강아지를 생각하는 주인 이야기, 42년 전 신혼여행 때 묵었던 호텔을 찾으러 온 노인 이야기…. 각 단편은 삶의 어느 장면을 미지근하게 보여주는 듯하지만, ‘다정함’이라는 공통된 정서가 묻어 있다.

불타는 도시 속 피난민에게 한 노인은 “악을 악으로 막을 수는 없으니 악을 물리치려면 선으로 맞서야만 한다”고 말한다. 곁에 없는 강아지를 떠올리며 “매일 너에게서 뭔가를 배웠다”고 말하는 주인과, 아내와 신혼여행 때 머물렀던 호텔을 찾아가는 노인을 보며 그 노인과 아내가 보냈을 가장 따뜻한 밤과 평범했던 일상을 대신 상상하는 사람들까지….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상실과 절망 속에서도 다정함을 잃지 않는다.

이 책의 출발점은 독자였다. 작가는 2021년 10월부터 올해 6월까지, 여러 도서관과 서점 낭독회에 온 이들에게 읽어주기 위해 스무 편의 소설을 썼다. 낭독회가 끝나면 독자와 대화를 했고, 그 대화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고쳐나가며 이 책을 완성했다. 표제작을 제외하곤 짧게는 원고지 16장, 길어도 50장이 되지 않는 짤막한 소설들이다. 1993년 시로 등단한 이후 여러 소설과 산문집으로 문학상을 휩쓴 작가가 쓴 글답게, 짧지만 강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이러한 작가의 태도는 수록작 ‘젖지 않고 물에 들어가는 법’에서 도드라진다. 개그맨이었다가 소설가가 된 주인공 신기철은 글을 쓰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소설가는 몰라도 되는 세계를 인식함으로써 그 세계를 가능하게 합니다. 그러니 창조는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에서만 나옵니다. 타인에게 이유 없이 다정할 때 존재하지 않았던 것들이 새로 만들어지면서 지금까지의 삶의 플롯이 바뀝니다. 비록 저는 그 사실을 모르고 살았지만, 제 뒤에 오는 사람들은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김태언 기자 beborn@donga.com
#얼어붙은 세상#이유없는 다정함#너무나 많은 여름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