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렴한 책 사면 배송비 때문에 더 비싸져?… 출판계 ‘정가 1만6800원 경제학’ 딜레마

  • 동아일보
  • 입력 2023년 6월 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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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라인 무료배송-10%할인 맞춰
정가 1만6800원에 출간 늘어
“가격인상 반발 커질것” 지적도

정가 1만6800원인 신간. 왼쪽 사진부터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에세이 ‘형사 박미옥’,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각 출판사 제공
정가 1만6800원인 신간. 왼쪽 사진부터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 에세이 ‘형사 박미옥’,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 각 출판사 제공
“신간 정가를 1만6800원으로 올렸을 때 독자 반응을 예측하라.”

최근 한 대형 출판사 대표는 마케팅 담당 부서에 이런 지시를 내렸다. 올 2월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등 서점 3사가 무료배송 기준을 기존 1만 원(주문가)에서 1만5000원으로, 배송비는 2000원에서 2500원으로 올린 상황을 고려한 것이다. 이 출판사 대표는 “무료배송 기준과 배송비가 올라 독자가 온라인으로 저렴한 책 한 권을 샀을 때 돈을 더 내야 하는 경우가 많아졌다”며 “독자 반응에 따라 신간 정가를 정할 계획”이라고 했다.

출판계에 이른바 ‘정가 1만6800원 경제학’이 떠오르고 있다. 책 정가가 1만6667원에 미치지 못하면 한 권만 산 독자는 배송비를 추가로 내야 하기 때문이다.

2014년 시행된 도서정가제에 따라 온라인에서 책값은 최대 10%까지 할인된다. 정가 1만6800원인 책은 1만5120원에 살 수 있다. 무료배송 기준(1만5000원) 이상이라 배송비를 내지 않는다. 반면 정가 1만6600원인 책은 10%를 할인하면 1만4940원에 사게 되므로 배송비(2500원)를 더해 총 1만7440원을 내야 한다. 정가 1만6700원인 책도 10% 할인하면 1만5030원이지만 출판계에는 ‘백 원 단위 가격을 짝수로 정해야 책이 더 잘 팔린다’는 통념이 있다고 한다.

신간 정가를 1만6800원으로 정하는 흐름은 이미 대세가 됐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지난달 신간 중 정가가 1만6800원인 책은 100종으로 지난해 5월(46종)에 비해 2배 이상으로 늘었다. 배송 기준 변경 직전과 직후인 올 1월과 3월을 비교해도 36종에서 99종으로 증가했다.

특히 문학, 에세이 분야 서적이 영향을 많이 받는다. 지난달 출간된 장편소설 ‘없는 층의 하이쎈스’(창비), 소설집 ‘이리하여 아무도 없었다’(현대문학), 에세이 ‘형사 박미옥’(이야기장수), ‘아니 에르노: 이브토로 돌아가다’(사람의집) 등이 정가 1만6800원으로 책정됐다. 한 출판사 대표는 “문학과 에세이는 ‘두껍지 않은 책’이 대세라 무료배송 기준 인상의 영향을 받는 1만 원 중반 가격대가 많다”고 했다.

스테디셀러의 가격 인상이 이어질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장편소설 ‘하얼빈’(문학동네·1만6000원), ‘파친코1’(인플루엔셜·1만5800원), ‘아버지의 해방일지’(창비·1만5000원)를 비롯해 한 권만 사면 배송비를 따로 내야 하는 책이 적지 않다. 반면 어린이책에 대해서는 굳이 책값 인상을 논의하지는 않는 분위기라고 한다. 유료 회원에게 책을 무료배송해 주는 ‘쿠팡’ 등에서 많이 팔리기 때문이다.

영화관이 티켓값을 올렸다가 관객들의 반발을 산 것처럼 책값 인상이 출판계 불황을 심화시킬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표정훈 출판평론가는 “웹소설, 웹툰 등 무료나 저렴하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가 늘어나면서 책값에 대한 저항감이 커졌다”며 “종이책은 고급 콘텐츠로 차별화해 소장욕을 자극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호재 기자 hoho@donga.com
#저렴한 책#배송비#정가 1만6800원 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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