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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현대적인 그림, 조선시대 민화 ‘책가도’[전승훈 기자의 아트로드]

입력 2022-06-18 16:00업데이트 2022-06-19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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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에 있는 기메동양박물관(Musée Guimet)은 1889년에 문을 연 유럽 최대의 동양미술 전문박물관이다. 기메박물관에는 김홍도의 풍속화를 비롯해 화조화, 산수화, 인물화 등 다수의 한국 미술품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방대한 조선시대 민화 수집품이 유명하다. 1888년 프랑스 인류학자이자 여행가인 샤를 바라(1842~1893)가 한국에서 수집한 민화들과 2001년에 현대화가 이우환 씨가 기증한 민화들이다.


그 중에서 프랑스 관람객들이 가장 눈을 떼지 못하는 작품은 ‘책가도(冊架圖)’ 혹은 ‘책거리(冊巨里)’로 불리는 병풍이다. 책과 문방사우(文房四友) 등 사랑방에 있는 책장 속에 여러 가지 물품을 그린 그림이다. 그런데 민화 책가도를 접한 첫 인상이 매우 현대적이다.

책장 속 책은 자를 대고 그린 것처럼 반듯반듯해 디자인 작품처럼 표현돼 있다. 또한 쌓여 있는 책더미가 마치 건물처럼 투시도법으로 표현돼 있는데, 시점이 다양하다. 책장의 칸에 있는 기물들이 왼쪽에서 본 모양, 오른쪽에서 쳐다본 모양, 위에서 본 시점, 아래에서 올려다본 시선으로 변화무쌍하다. 르네상스 시대의 발명품인 원근법이 조선시대 민화에 사용됐는데, 마치 입체파 화가 피카소 작품처럼 왼쪽, 오른쪽, 위 아래에서 내려다본 다양한 시점이 한 폭의 그림에 담겨 있다. 외국 관람객들도 “조선시대 민화에서 어떻게 이렇게 현대적인 회화 느낌이 날 수 있느냐”며 연신 “뷰티풀!”을 외치게 만든다.


조선시대 민화인 ‘책거리 병풍도’는 지난 4월부터 11월까지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리고 있는 ‘책거리: 우리 책꽂이, 우리 자신’ 전시회에서도 선보였다. 한·오스트리아 수교 130주년을 기념해 열린 이 전시는 합스부르크 왕가 페르디난트 대공의 방대한 소장품이 있는 ‘빈 세계박물관(Weltmuseum Wien)에서 열렸다.

이번 전시회에서 단독 디지털아티스트로서 참가한 이돈아 작가의 작품 ’To be, Continued‘(렌티큘러 에디션)는 빈 세계박물관에 영구 소장됐다. 이돈아 작가의 디지털아트 영상작품은 전시회 오프닝 콘서트에서 상영되기도 했다. 이 작가의 ’책거리‘ 작품은 뉴욕의 마천루 빌딩과 책가도가 오묘하게 중첩돼 있는 모양이다. 전통 민화가 현대 도시의 공간으로 확장돼 재탄생한 독특한 세계다. 이 작품의 제목은 ’시공연속체(時空連續體)-Space Time Continuum‘.


오스트리아에서 선보인 이돈아 작가의 조선 민화와 책가도, 달항아리, 모란화 등 다양한 작품세계를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서도 열리고 있다. 21일까지 볼 수 있는 ’무우수갤러리 기획전 K-ART 시리즈2 : 이돈아 초대전 Omni_Verse‘ 전시회다. 서울과 뉴욕을 오가며 작품활동을 해온 이 작가를 만나 인터뷰했다.


―책가도와 뉴욕의 빌딩숲을 겹쳐서 그리는 이유는.

“책가도 병풍 속의 책더미들과 도시의 빌딩이 처음엔 조형적으로 굉장히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속에 담긴 의미까지도 닮은 것을 발견하게 됐다. 책가도는 정조가 특별히 사랑했던 그림이었다. 책과 그림을 사랑한 정조는 어좌 뒤에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병풍을 두는 관례를 깨고 책거리 병풍을 펼쳐놓을 정도였다. 정조는 학문에 정진하라는 의미에서 책가도를 사랑했는데, 왕실과 사대부들을 넘어 서민층으로까지 유행하면서 자기가 갖고 싶은 기물을 책가도에 하나씩 채워나갔다. 학문에 대한 열망부터 인생의 행복과 장수까지 상징하는 물건들이었다. 책가도에 민초들의 욕망이 담겼듯이, 빌딩숲도 네모난 한칸 한칸마다 사람들의 강렬한 욕망이 담긴 것이 똑같다고 생각했다. 부정적인 욕망이 아니라, 더 발전하고 싶은 삶의 긍정적인 욕망이라고 생각한다.”


이돈아 작가의 그림 속에는 ’비뚤어진 사다리꼴‘ 모양의 도형이 등장한다. 2005년 뉴욕에서 생활하던 때 뉴저지의 공장을 빌려 작품 활동을 하며 번민, 불안 속에서도 자아를 지키려했던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도형이다.

“2000년도부터 조선시대 민화를 추상적으로 표현하는 작업을 해왔어요. 뉴욕에 있는 친정집에서 머물며 2년 동안 작업을 했는데,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민화니 꽃이니 다 빼고 나를 그리자고 생각했습니다. 쓰러질 듯 위태롭게 서 있는 콘크리트 빌딩이 제 자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뚤어진 6면체 건물은 현실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모양이다. 원근법에도맞지 않는 기하학적 조형물이다. 내 불안한 현재의 심리상태를 있는 그대로, 잘 표현해주는 것 같았습니다.”


―조선시대 민화인 책거리 병풍도가 현대적인 미술로 보이는 이유는.

“저도 내가 그린 기하학적 도형과 책거리 그림이 조형적으로 비슷하다고 느꼈다. 책거리는 원근법, 투시도법상으로 정확히 맞지 않는 데, 그래서 더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다. 책가도 속 시렁 위에 놓인 책과 기물들은 밑에서 위로 보기도하고, 위에서 내려다보기도 하고, 좌우에서 바라본 시점이 다양하다. 정말 천재적인 회화 작품이다. 이렇게 다양한 시점은 진정한 ’자유로움‘이 담겨 있다. 선비들이 공부를 할 때 한쪽 면만 파고들 것이 아니라, 다양한 시점에서 이리저리 비판적으로 바라보면서 궁리해야 한다는 의미를 강조한 뜻일 수도 있다. 유럽에서 피카소와 같은 입체파가 나온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정해진 틀을 깨고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자연스럽게 그림으로 표현된 것 같다.”


전시장에는 영화 ’인터스텔라‘에 나온 책이 세로로 가득 꽂혀 있고, 책이 동동 떠다니는 거대한 책꽂이 모양의 책가도 그림도 있다. 이 작가는 “이 영화를 너무 좋아해서 마지막 장면에 주인공이 아빠를 만나는 서가를 상상하며, 책가도를 변형시켰다”고 말했다.

책가도와 빌딩숲을 그린 작품에 이어 이돈아 작가가 새롭게 내놓은 작품은 ’달항아리‘ 시리즈다. 순백의 달항아리가 우주를 배경으로 한 보름달로 변화하는 모습이 중첩되는 렌티큘러(lenticular·보는 각도에 따라 이미지가 변화하는 3D입체 제작기법) 작품이다. 이 작품 앞에서 걸어가거나, 고개를 약간씩 움직이면 각도에 따라 달이 되었가, 달항아리로 변화한다. 이 작가의 책가도와 달항아리, 모란꽃 그림은 10월에 오픈하는 경기도청 신청사 1층 로비에 대형작품으로 설치돼 선보일 예정이다.


―조선백자인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이유는. 달항아리의 매력은 무엇인가.

“달항아리는 크고, 넉넉해서 여유와 풍요를 상징하는 기물이다. 그런데 저는 달항아리를 볼 때마다 ’절제‘의 아름다움이 너무나 감명적이었다. 누구나 하얀 도화지를 주면 그림을 그리고 싶어하겠는가. 애들이 벽에 낙서를 하고 싶어하듯이 말이다. 그런데 새하얀 달항아리 표면에 아무 것도 그리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뿐이다. 이렇게 큰 항아리 같은 경우에 도공이라면 그림을 그려넣고 싶었을 것이다. 고려청자, 청화백자, 분청사기처럼 얼마든지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넣을 수 있는 실력이 있는데도, 달항아리는 거기에서 멈췄다. 미완성이라고 느낄 수도 있지만, 절제에서 오는 숨막히는 아름다움이다. 맥시멀리스트인 나는 언제나 캔버스를 꽉꽉 채우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정반대인 예술작품을 보니까 비어있는 여백의 아름다움이 정말 매력적이다.

일본사람들이 우리나라 막사발에 대해서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하는 것에 대해 처음엔 잘 이해를 하지 못했다. 그런데 일본 나오시마 축제 때 여행을 가서 깨달았다. 일본은 도자기 뿐 아니라 공원의 조경까지도 극도의 완벽함을 추구한다. 흐트러뜨리는 것을 못하기 때문에 일본인들은 막사발 같은 것을 못 만든다. 매뉴얼에 따른 완벽함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사람들이 무심한 듯,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만든 막사발에 그렇게 흥분하는 것이다. 아무 것도 그려넣지 않은 달항아리의 울퉁불퉁한 표면에 빠져드는 것도 그 이유다.”


―달항아리와 달을 겹치는 작품을 만든 이유는.

“10월에 오픈하는 경기도청사 1층 로비에 설치되는 10폭짜리 족자(가로 30m) 작품 중의 하나로 달항아리 작품이 들어간다. 10폭짜리 족자에는 그림과 렌티큘러 작품, 미디어아트가 융합된 작품들이 들어간다. 지난해에 8개월에 걸쳐 이 작품을 만들고 있던 중 뉴욕에 살고 계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어머니 장례식에 갈 수가 없었다. 작품 완성기일이 임박해서 미국에 다녀오면 자가격리 때문에 작업을 완료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유튜브로 장례식을 치르면서 정말 울면서 작업을 했다. 2018년에 아버지가 뉴욕에서 돌아가셨을 때 물려주신 달항아리가 있었다. 부모님을 그리워하며 밤하늘의 달을 쳐다보면서, 하늘나라에서 평안하게 쉬시길 기원하면서 달항아리 시리즈를 시작하게 됐다. 방 안에 놓인 달항아리가 우주로 올라가 둥그런 보름달로 변화하는 작품이다.”

―렌티큘러 제작기법으로 만든 이유는.

“렌티큘러는 옛날에 학교 다닐 때 책받침에서 많이 보던 것이다. 과자봉지 속에 들어있는 캐릭터도 렌티큘러로 만든 것이 많다. 책받침이나 엽성, 캐릭터에는 ’렌즈‘라고 불리는 얇은 아크릴판을 사용한다. 제 작품은 2mm 짜리 아크릴판을 사용해 3차원 입체감을 높였다. 제 그림 속 민화적 소재는 과거를 상징하고, 빌딩과 같은 것은 현재(미래)의 상징한다. 제가 과거와 현재를 다루는 작가니까, 2차원으로 보여주는 렌티큘러 제작기법이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민화를 소재로 한 미디어아트를 만들게 된 계기는.

“제가 30년 전 결혼할 때 부모님께서 혼수품으로 시댁에 병풍을 보냈다. 까맣게 잊고 지내다가 남편에게 물어봐서 시댁에서 병풍을 찾았다. 병풍에는 전서체로 글씨가 써 있었는데 해석이 안됐다. 아는 지인의 도움으로 구글링을 해서 번역해보니 후한시대 학자 중장통(仲長統)의 시 ’낙지론(樂志論)‘이었다. 물질을 넘어 행복하게 사는 삶에 대해 쓴 시인데, 시집가는 딸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이 ’낙지론‘을 내용으로 한 미디어 아트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디어아트의 주요 모티브 중의 하나는 단청이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단청은 지붕과 기둥, 면과 면을 ’연결‘해주는 무늬다. 뉴욕과 서울을 이어주는 모티브로 오방색 끝과 단청을 선택했다. 그 안에 달항아리, 빌딩, 책가도, 모란꽃과 같은 다양한 영상이 이어진다. 부모님이 사랑하셨던 옛 기물들은 그리움의 대상이고, 알루미늄이나 렌티큘러, 미디어아트 같은 소재는 현대적인 것을 상징한다.”


―모란꽃 그림도 많은데, 그 의미는.

“민화에서 모란꽃은 부귀영화를 상징한다고 해서 집 안에 걸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이 부귀영화하면 부(富)에만 집중하는데, 저는 고귀함에 더 끌린다. 모란은 황후의 꽃같은 느낌이라 매우 좋아한다. 모란은 스스로 뽐내지 않는다. 본인 자체가 고귀한 화려함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뽐내지 않아도 주변에서 다 느끼니까 존중받는 것이다. 남을 귀하게 여기면 자신도 귀함을 받게 된다.”

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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