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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문화

“아흔 넘으니 나를 색칠한 모든 것 벗기고 싶어져”

입력 2021-12-17 03:00업데이트 2021-12-17 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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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번째 시집 ‘나도 피카소처럼’ 펴낸 92세 이생진 시인
이생진 시인은 “젊은 후배들이 쓴 작품도 꾸준히 읽고 조언을 해주고 있다. 노령연금 30만 원은 모두 책 사는 데 쓴다”며 웃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피카소는 아흔이 넘어서도/젊은 여인의 숨소리에 맞춰 붓을 놀렸다/아무나 할 수 있는 손놀림이 아닌데/사람들은 함부로 피카소처럼 살고 싶다고 한다”(시 ‘나도 피카소처럼’ 중)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1881∼1973)의 90대를 이해하기 위해 스스로 90대의 시선을 갖출 때까지 뭉근히 기다린 시인이 있다. 이생진 시인(92)은 수십 년간 피카소의 그림과 시를 읽고 그 감상을 기록하면서도 그가 사망한 나이 92세가 돼서야 이를 엮어냈다. 그가 최근 출간한 마흔 번째 시집 ‘나도 피카소처럼’(우리글)에는 이 시인이 피카소를 주제로 써 온 시들이 수록됐다. 13일 만난 시인의 이야기는 이러했다.

“아흔 넘어 보니 도덕이니 윤리니 내 몸을 색칠한 모든 것을 벗겨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듭니다.”

이 시인은 등단 이후 52년이 흘렀지만 여전히 현역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 말년까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펼친 피카소는 나이가 들수록 더 궁금해지는 예술가였다고 한다. 그는 같은 작품을 보더라도 나이를 먹어가며 피카소의 의중에 더 가까워지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 시인은 “젊을 때는 피카소의 그림 속 여인들만 옷을 벗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나이가 들어서 보니 피카소도 하나씩 옷을 벗고 점점 더 솔직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작품 활동을 멈추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그는 손과 뇌가 굳지 않도록 매일 몸을 쓴다. 오전 3시에 기상해 시를 한 편 쓴 뒤 해가 뜨자마자 집을 나서 인근 도봉산 자락을 1만5000보씩 걷는다. 매일 5분씩 물구나무를 서고 팔굽혀펴기와 철봉 운동도 한다. 이 시인은 “피카소의 인생이 더 길었다면 그만큼 더 좋은 작품이 나왔을 것 같다. 나도 가능하면 오래 시를 쓰고 싶어서 운동을 철저히 한다”고 했다.

‘이생진’ 하면 섬을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의 많은 시가 울릉도를 비롯한 섬에서 탄생했기 때문. 제주도 성산포에서 일출의 감동을 표현한 시 ‘그리운 바다 성산포’(1978년)는 그의 대표작이다. ‘섬 시인’이라는 수식어를 아낀다는 그는 “평생을 시는 발로 쓰는 것이라 믿고 살아왔다. 섬에서 아침 바람 쐬고 시 쓰다 쓰러져 세상을 떠나는 게 마지막 바람”이라는 말을 남겼다.

전채은 기자 chan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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