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과학적 현실 진단 위해 뭉쳤다’ 96년 전 첫 ‘싱크탱크’

이진 기자 입력 2021-09-17 11:40수정 2021-09-17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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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11월 30일
플래시백


1925년이 저물어 가는 11월 28일 경성 종로의 기독교청년회관(YMCA)에서 모임 2개가 이어달리기 하듯 열렸습니다. 오후 4시 반에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창립모임이 시작됐고 이 모임이 끝난 오후 6시에는 조선사정조사연구회(조선연구회) 제1차 조사보고회가 개최됐죠. 먼저 열렸던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창립모임에 참석했던 인사 대부분이 곧바로 조선연구회 보고회에도 자리 잡고 앉았습니다. 무슨 보고를 하나 궁금하기도 하고 마침 시간도 맞아 들러봤던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두 조직은 마치 한 몸의 서로 다른 기관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태평양문제연구회가 몸통이라면 조선연구회는 머리라는 비유가 적당할까요? 1차 조사보고회 주제는 조선의 세금제도였습니다.

조선사정조사연구회는 1925년 9월 15일 경성 명월관에서 결성됐다. 같은 해 11월 28일 경성 종로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제1차 조사보고회에 참석한 회원은 26명이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1차 조사보고회가 열린 같은 장소에서 창립모임을 열었고 모두 18명이 참석했다. 조선사정조사연구회 회원이면서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 창립회원은 파란색 테두리로 표시했다.


태평양문제연구회는 ‘하와이 뒤흔든 ‘동화정책과 일본어 강요’ 규탄 목소리’(동아플래시백 2001년 7월 30일자)에서 소개했듯이 미국 민간학술단체입니다. 1925년 6월 하와이에서 제1회 태평양회의를 열면서 영향력을 키워갔죠.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는 태평양회의 참석을 주도했던 기독교계열이 앞장서 만들었습니다. 대표적인 실무자가 기독교청년회 총간사 신흥우였죠. 그런데 1회 회의에서는 조선 형편을 각국 대표에게 제대로 알려 우호적인 여론을 만들어 내기 어려웠다는 점이 가장 안타까웠습니다. ‘어렵다’ ‘힘들다’라며 매달린다고 해서 효과를 낼 수는 없었죠. 구체적인 자료를 만들어 설득할 조사기관 즉 싱크탱크가 필요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조직이 조선연구회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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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연구회 회원들은 당시로는 어디에 내놔도 꿇리지 않는 학력과 경력을 갖췄습니다. 대부분 일본이나 구미 유학을 경험한 인재들이었죠. 특히 조선일보 논설위원 김준연과 배재학당 교사 박승철, 중앙고보 교장 최두선은 일본과 독일 두 나라에서 공부했습니다. 경제 전공자들과 연희전문 상과교수들이 많은 점도 특징이었죠. 조선의 경제현실을 분석할 싱크탱크 구성원으로는 이보다 적합할 수는 없었습니다. 또 줄잡아 6명이 1925년 2~10월에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신예들이었습니다. 돌아오자마자 학문으로 기여하겠다는 열의가 넘쳤을 겁니다.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조선일보 등 언론계 인사들도 많이 참여했죠.

고등경찰요사는 1906년 의병항쟁으로부터 1927년 선은대구지점 폭탄사건까지 일제강점기 때 일제의 눈으로 볼 때 '폭도의 활동'을 다룬 기록이다. 1934년 간행된 이 자료는 역사적 사실을 밝혀놓았을 뿐만 아니라 민족운동을 충실히 담은 것으로 평가된다. 고등계형사가 반드시 읽어야 할 자료로 일제 경상북도 경찰부가 만들어 활용한 극비기록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눈에 띕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가 직접 조사‧연구를 맡지 않았던 점입니다. 태평양문제연구회 자체가 민간학술단체이고 조선지회에도 전문가들이 많았는데 말이죠. 그 이유는 기독교청년회의 행보에 의문을 품었던 탓이었다고 합니다. 일제에 협조적이라는 의심이었죠. 그래서 조선연구회는 윤치호 신흥우 같은 기독교청년회 인사들이 빠지고 일부 사회주의자들까지 아우르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조선연구회는 태평양문제연구회 조선지회를 단순 지원하는 조직이 아니었습니다. 동아일보 1925년 11월 30일자 기사 제목 ‘순전히 학술적으로 조선사정을 조사 연구’는 명분이었고 ‘그 너머’를 겨냥했죠. 그 배경에는 동아일보 주필 송진우가 있었습니다.

조선사정조사연구회 제1차 조사보고회 기사가 실린 동아일보 1925년 11월 30일자 사설 '현실 연구의 필요'. 현실을 정확하게 관찰하지 못해 개념론이나 공상론에 치우친 주장이 유행하고 있다며 조선사정조사연구회의 역할이 막중한만큼 시작과 끝이 한결같이 꾸준하게 활동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송진우는 1회 태평양회의 참가 뒤 쓴 사설 ‘세계대세와 조선의 장래’를 ‘사상적 훈련과 민족적 단결로 복잡한 사상계를 정리하고 통일하는 조사와 비교 연구를 해서 중심세력을 확립하자’라고 결론지었습니다. 사설 최종회가 실린 지 9일 만에 조선연구회가 출범했죠. 조선연구회가 과격한 공산주의를 배격하고 민족정신 보존에 노력한다는 원칙을 내세운 이유가 이해됩니다. 조선연구회는 조선물산장려회와 민립대학 설립활동 지원에도 나섰죠. 모두 민족적 중심단체 건설을 통한 합법적 정치활동을 추진해온 송진우의 구상과 연결됩니다. 그래서 일제는 ‘(조선연구회를) 장래 민족운동의 기관으로 삼으려는 속셈이 있다’고 의심했죠. 하지만 1년이 안 돼 최대 걸림돌을 만나게 됩니다. 송진우의 투옥이었습니다.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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