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역사 덕후… 자산어보, 아는 만큼 더 깊게 보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21년 3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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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극 대가 이준익 감독의 ‘자산어보’ 31일 개봉
“어려운 내용 쉽게 전달하는게 감독 미덕
‘변산’ 실패는 ‘자산어보’ 제작의 큰 자산”
유배 간 정약전과 청년 어부의 만남 그려… ‘수묵화 같다’ ‘또 보고 싶다’ 관객 평

영화 ‘자산어보’에서 흑산도의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와 유배를 온 정약전(설경구)이 옥수수를 먹는 장면(왼쪽 사진 왼쪽부터). 이준익 감독(오른쪽 사진)은 “동주를 찍으면서 흑백영화에 자신감이 생겼다. 흑백영화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더 새로운 것, 세련된 것, 특별한 것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영화 ‘자산어보’에서 흑산도의 청년 어부 창대(변요한)와 유배를 온 정약전(설경구)이 옥수수를 먹는 장면(왼쪽 사진 왼쪽부터). 이준익 감독(오른쪽 사진)은 “동주를 찍으면서 흑백영화에 자신감이 생겼다. 흑백영화가 구시대의 유물이 아니라 더 새로운 것, 세련된 것, 특별한 것임을 알았다”고 말했다. 메가박스중앙㈜플러스엠 제공
“일반시사 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오는 관객 평을 보니 영화를 쉽게 봤다고 하더라. 다행이다.”

23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 카페에서 만난 이준익 감독(62)은 “어렵게 공부해서 만들고, 관객에게는 쉽게 전달하는 게 감독의 미덕”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이날 오전 10시부터 6시간 내내 이어진 인터뷰에 목이 쉰 이 감독은 “요즘엔 나이가 들어 영화 만드는 것보다 인터뷰 하는 게 더 힘들다”고 농을 쳤다.

31일 개봉을 앞둔 그의 14번째 영화이자, ‘동주’에 이은 두 번째 흑백영화인 ‘자산어보’에 호평이 쏟아지고 있다. 시사에 참여한 관객들 사이에서 ‘믿고 보는 이준익 사극’ ‘모든 장면이 수묵화 같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순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는 등의 반응이 나오고 있다.

자칭 ‘역덕’(역사 덕후)인 이 감독은 국내 영화 중 세 번째로 천만 관객을 넘긴 ‘왕의남자’부터 ‘사도’ ‘동주’ ‘박열’까지 꾸준히 역사에서 실존인물을 재창조해왔다. 이번에는 조선 후기 학자 정약전(설경구)과 그의 제자 창대(변요한)를 다뤘다. 정약전은 순조 즉위 후 벌어진 신유박해 당시 서학(천주교)을 섬겼다는 이유로 동생 정약용(류승룡)과 함께 강진과 흑산도로 각각 유배를 떠난 인물. 13년의 흑산도 유배 생활에서 청년어부 창대의 도움으로 바다생물을 연구하고 이를 ‘자산어보’로 편찬하기까지의 과정을 그렸다.

극 중에서 창대는 정약전과 지식을 나누는 진솔한 벗이지만, 때론 사상적으로 대립하기도 한다. 서학을 받아들여 수평 사회를 지향하는 정약전과 달리, 창대는 조선의 봉건질서를 지탱하는 성리학을 신봉한 데 따른 것. “끝 모를 사람보다 자명하고 명징한 사물 공부에 빠지기로 했다”는 정약전에게 창대는 “목민심서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다. 양반의 서자 출신인 창대는 글공부를 하고 벼슬길에 오른다. 이 감독은 자산어보에서 9번에 걸쳐 짧게 언급되는 창대를 끄집어내 약전과 대칭되는 캐릭터로 만들었다.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선 비교가치를 대입해야 한다. 동주를 선명하게 드러내려면 그 대칭점에 있는 송몽규를 그려야 하는 것과 같다. 정약전과 자산어보의 가치관을 뚜렷이 드러내기 위해 목민심서의 가치관을 대변하는 인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천만 감독, 사극의 대가로 통하는 이 감독이지만 그 역시 실패의 쓴맛을 봤다. 관객 50만 명이 채 들지 않은 전작 ‘변산’(2018년)이 그랬다. “성의 있게 실패하는 건 보약이 된다”는 그는 “변산의 실패가 없었다면 자산어보도 나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자산어보와 변산 각본을 공동 집필한 작가(김세겸)가 같다고 했다. 패자부활전이라는 거다.

“조선의 근대성에 대한 이야기를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다. 2014년쯤부터 동학과 서학을 공부하다가 조선 후기 천주교도 황사영에 대한 연구로 이어졌다. 황사영이 신유박해 때 피신한 제천 토굴을 찾아갔고, 그를 연구한 신부님도 만났다. 하지만 ‘아직 준비가 안 됐다’는 생각에 접었다. 변산 실패 후 초심으로 돌아가자고 마음을 다잡았는데 그때 자산어보가 보였다.”

이 감독은 관객들이 영화를 쉽게 봐서 다행이라며 입을 뗐지만 인터뷰를 마칠 땐 이와는 반대되는 얘기를 수수께끼처럼 남겼다. “이 영화가 쉬운 영화인가를 다시 생각해보면 쉽지 않다. 한 번 보면 30%밖에 이해가 되지 않을 거다. 약전과 창대의 감정과 여정에 집중하면 쉽지만 바탕에 깔린 시대 상황, 개인의 내재된 욕망과 가치관을 모두 음미하려면 엄청 공부가 필요하다. 그건 관객의 몫이다.”

김재희 기자 jetti@donga.com
#이준익#자산어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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