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세계적 흑인 코미디언의 ‘웃픈 성장기’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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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난 게 범죄/트레버 노아 지음·김준수 옮김/424쪽·1만6800원·부키

몇 년 전 미국 월스트리트의 로펌에서 일하는 대학 동기를 만났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20, 30대는 ‘더 데일리 쇼’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 것 같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도, CNN도 아니고 케이블TV의 시사 코미디 뉴스쇼라고? 얼마 뒤 더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그 쇼의 새 진행자가 들어섰는데, 남아프리카공화국 출신이라고? 그가 이 책을 쓴 트레버 노아다.

이 책은 최악의 인종차별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분리시켜 증오하다’로 풀이된다)가 횡행하던 1984년 남아공에서 태어나 세계적인 코미디언이 된 그가 쓴 자신의 성장기이자 엄마에게 바치는 헌사다.

노아는 어렸을 때 엄마랑 손을 잡고 길을 걷다 경찰이 나타나면 서로 손을 놓고는 모르는 사람처럼 떨어져야 했다는 코미디 레퍼토리가 있다. 유튜브로 볼 때는 마냥 웃었지만 이 책을 보니 아파르트헤이트 아래서 흑인 여성과 백인 남성이 성관계를 하면 둘 다 징역형에 처할 수 있었다. 노아의 엄마는 흑인, 아빠는 독일계 스위스인이다.

유색인으로 분류된 노아 같은 혼혈은 백인도 흑인도 아니었다.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 난 늘 어느 그룹에 속해야 할지 탐색하고 내가 누구인지 설명해야 했다.” 그를 구원한 건 엄마의 지시와 교육으로 능숙하게 된 영어, 아프리칸스어 및 9개 종족의 언어였다. “피부색이 아닌 언어가 다른 사람에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더 잘 보여준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카멜레온이 됐다.”

운전사의 살해 위협을 피해 불법 미니버스에서 모자가 뛰어내리는 등 폭력과 무법을 이웃하며 살아온 이야기지만 “우리는 그냥 닭을 먹지 않았다.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우리 가족은 고고학자에게는 악몽이었다. 뼈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으니까” 같은 유머가 곳곳에 잠복해 있다.

‘흑인 생명도 중요하다’ 운동이 거셌던 올해, 인종차별에 관한 여러 책이 나왔지만 이 책만큼 흥겹고 강렬하고 명확하게 짚은 책은 없다. 번역도 훌륭하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태어난 게 범죄#트레버 노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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