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여행길 따라 산책하듯 나를 만나네

  • 동아일보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지음/208쪽·1만4000원·달

“보이지 않는 손이 삶을 강하게 구부릴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지? 더 낮게, 더 낮게, 엎드리는 것 말고는 다른 도리가 없다. 바람이 지나갈 때까지 뿌리는 흙을 향해 더 맹렬하게 파고드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엎드렸던 흔적을 나무도 사람도 지니고 있다.”

심하게 굽은 들판의 나무 한 그루에서 누군가는 조형미를 느끼고, 또 다른 이는 이 지역의 바람이 거센 이유를 생각하겠지만 저자는 인간이 맞이하는 운명의 흔적을 본다. ‘어두워진다는 것’을 비롯한 여러 시집으로 사랑받아 온 시인의 산문 45편이 책에 담겼다. “그가 그린 어떤 길은 벌목의 상처를 지니고 있어/내 발길을 오래 머물게 하네/…/길을 그리기 위해서는/…/그 쓸쓸한 소실점을 끝까지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여는 시 ‘길을 그리기 위해서는’에서)

세계 각지의 풍경으로 걸어 들어가는 저자의 행위는 자신의 내면을 산책하는 일과 같다. 사람들의 평범한 뒷모습도 시인의 눈을 거치면 새삼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타인의 시선에 무방비로 노출된 등을 가졌다는 것. 자신이 알지 못하고 어찌할 수도 없는 신체의 영역이 있다는 것이 왠지 두렵고도 안심이 된다.”

비 오는 중국 옌지의 한 들판에서 아기를 업고 걷는 여윈 노인, 영국 런던에서 자선 가게의 계산원으로 일하는 장애인, 개에게 담요를 내어주고 책을 읽는 유럽의 노숙자, 터키의 앙카라에서 만난 한 무리의 아이들을 시인은 만난다. 카프카 고흐 안네 등 비극적인 삶을 살다 일찍 세상을 떠난 이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서기도 한다.

책에는 시인이 찍은 사진도 함께 담겼다. 글의 내용과 직접 관련된 사진이어서 저자가 어떤 풍경을 보고 글과 같은 생각을 떠올린 것인지 바로 다가온다. 마치 함께 산책을 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꼭 여행지에 관한 정보가 없어도, 심오한 철학이 담긴 게 아니라도 좋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과장 없고 따스한 시선이 담긴 문장이 독자의 가슴도 따듯하게 만든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나희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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