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최지훈]어머니의 냉장고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1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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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박초희 기자 chok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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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한 달여 만에 본가를 찾았다. 적적한 집이다 보니 나 한 명 식탁에 추가되는 것이 큰 행사가 된다. 어머니는 평소에 잘 드시지 않는 반찬을 상에 올리셨다. 내 덕분에 진수성찬을 구경한다는 아버지의 농담이 어딘지 외롭다. 즐거운 식사가 끝나고 남은 음식을 넣으려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 자리가 없었다.

우리 집은 냉장고가 세 대다. 김치냉장고와 양문형 냉장고 그리고 대형 냉동고다. 두 분 사시는 집치고는 과한 규모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남은 음식 하나 넣어둘 자리가 없다. 사실 우리 집 냉장고는 오랜 이슈거리다.

“냉장고에 자리가 부족하면 내용물을 처리해야지 냉장고를 새로 사는 게 어딨어요?” 그렇게 시작된 냉장고 이야기는 벌써 3년이 넘게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다. 치운다 말씀은 하지만 냉장고는 변함이 없었다.

냉장고엔 유통기한이 10년 지난 영양제부터 간장만 남은 간장게장까지 우리 집의 먹거리 역사가 고스란히 냉장 보관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란스럽게 시작한 냉장고 정리 작업은 “다 쓸 데가 있다”는 어머니의 말씀 한마디에 원상태로 돌아갔다.

어머니의 냉장고는 아침 방송과 직결된다. 언젠가 집이 온통 매실로 가득 차던 때가 있었다. 한땐 각종 해독주스 얼린 덩어리들이 터질 듯 들어차 있었고, 현미, 돼지감자, 울금, 연근, 홍합, 최근에는 코코넛오일도 있었다. TV를 없앨 수는 없다. 다 먹어버리자. 냉장고에 모아 두는 어머니보다 먹어 치우는 내가 더 빠르다면 승산이 있다. 냉장고에 가득한 재료를 잡히는 대로 꺼내와 끼니를 때우기 시작했다. 변한 건 건강식으로 가득 찬 내 식단뿐이었다.

나는 어머니 말을 잘 듣는 착한 아이였다. 어머니는 진리였다. 그러던 어머니가 틀리기 시작했다. 중학생이 되던 쯤인가. 머리가 굵어지며 어머니의 오답을 종종 알아채기 시작했다. 세상의 모든 진리였던 어머니께서 평범한 인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깨달음은 묘한 배신감을 불렀고 반항으로 이어졌다. 어머니의 말씀은 틀린 것 투성이였고 세련되지 못한 것이었다. 하지만 과도기는 짧았다. 금방 어른이 되었고 어머니는 다시 진리가 되었다. 날뛰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위를 벗어나지 못한 스스로를 보았을 때 심정이 이랬을까.

스무 살. 공부 열심히 하라는 어머니 말씀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공부는 평생 하는 것이므로 지금 열심히 할 필요가 없다는 이상한 주장을 폈었다. 서른이 넘은 지금 공부가 주업이던 학생 시절이 사무치게 그립다. 해야 할 공부, 하고 싶은 공부가 넘쳐나지만 시간과 체력이 20대와는 다르다.

독립해 살게 되며 식사를 챙기기 어려웠다. 만들어진 음식을 사서 데워 먹는 날이 많았다. 식재료를 일일이 챙겨 손질해가며 조리할 여유가 나질 않았다. 어머니의 냉장고는 과연 ‘다 쓸 데’가 있었다. 한가득 차 있는 그 냉장고는 내 보물창고가 되었다. 절대 나가지 않을 것만 같던 냉장고 안의 저장품들이 나를 위해 비워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찰나의 망설임도 없이 모두 꺼내 주셨다. 어머니의 큰 그림을 이제 겨우 볼 수 있다.

한밤중에 목이 말라 냉장고 문을 열어 보니, 한 귀퉁이에 굴과 매생이가 손질되어 있다. 자취집으로 돌아가는 벼룩의 가방 속엔 꽝꽝 언 굴과 매생이가 가득하다. 이 정도 양이면 한 달간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아, 어머니. 나의 진리이시여. 오래도록 내 곁에 계셔 주세요.
 
최지훈 호호스프 대표
#어머니의 냉장고#아침방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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