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사랑 끝에 사랑 있고, 내 생 끝에 당신이 있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0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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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꽃잎보다 붉던/박범신 지음/1만4500원·388쪽·문학동네

“벌써 경직이 시작된 모양이다.”

남편은 막 세상을 떠났다. 아내는 죽은 남편의 몸을 꼼꼼하게 닦고 있다. 검버섯 비늘로 얼룩진 상반신을 닦아내고 겨드랑이 사이로 수건을 밀어 넣는다. 물수건에는 고불고불한 겨드랑이 털이 묻어나온다. 박범신의 새 장편 ‘당신’은 이렇게 충격적인 장면을 섬세하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막 숨진 남자는 치매를 앓던 70대 주호백, 시신을 깨끗하게 정리하고 집 앞 마당에 묻는 여성은 주호백의 부인 윤희옥이다.

작가는 이 일이 벌어진 2015년 어느 날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계속해서 두 사람의 과거를 불러낸다. 시골의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 윤희옥을 처음 봤을 때부터 어린 주호백은 윤희옥을 짝사랑했다. 성장한 윤희옥의 마음이 향한 사람은 혁명을 꿈꾸던 남자 김가인이다. 김가인이 감옥에 들어간 뒤 윤희옥에게 남은 건 배 속의 아이고, 윤희옥을 받아주는 건 순정을 온전히 간직하던 주호백이다.

작가는 인내와 헌신으로 살아오던 남자 주호백이 치매가 닥친 이후 광포하게 속마음이 폭발하는 모습을 간간이 보여준다. 노년의 윤희옥은 남편이 생애 대부분을 자신에게 헌신했듯 남편을 끈기 있게 간병한다. 작가는 기억을 잃어가는 대신 억눌렸던 감정을 쏟아내는 남자, 그런 남자에게 자신이 받았던 기억 속 헌신을 돌려주는 여자를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망각이라는 장애를 마주하고도 그것을 넘어서는, 함께 해온 오랜 시간의 의미를 성찰한다.

부부가 겪어온 삶의 굴곡들은 현대사의 격랑 그대로다. 어린 주호백과 윤희옥이 처음 만났던 6·25전쟁 직전의 불안함, 1960년 뜨거웠던 4·19혁명, 1972년 유신헌법 공포, 1980년 5·18민주화운동과 1993년 문민정부 출범까지 한평생의 사랑과 역사를 겹쳐놓는다. 작가의 말을 대신한 헌사에서 박범신은 이렇게 적었다. “사랑의 끝엔 무엇이 있느냐고 누가 물었을 때 ‘그야 당연히 사랑이 있지!’ 당신은 담담하게 대답했어.” 작가의 문학앨범 ‘작가 이름, 박범신’도 함께 출간됐다.

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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