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거리의 화가’ 23년 만에 유네스코에서 재회

파리=전승훈특파원 입력 2015-09-17 17:41수정 2015-09-17 2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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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여기서 좀 그려도 될까요?”

1992년 4월 프랑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 앞 광장. 관광객들에게 초상화를 그려주는 10여 명의 ‘거리의 화가’들 앞에 한국에서 막 건너 온 30대 화가가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거리의 화가들에게도 엄연히 자신만의 구역이 있는 법. 중국 천안문 사태로 구속됐다가 파리로 망명왔던 화가 왕두도 당시 이 곳에서 초상화를 그리고 있었다. 그는 “한국에서 온 청년의 수줍은 표정과 눈빛이 너무나 예뻐서 내 옆에서 그리게 해달라는 요청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중국 출신의 세계적인 조각가 왕두(王度·58)와 프랑스 한국현대미술작가협회인 ‘소나무회’ 대표인 한홍수 화백(56). 파리 거리의 가난한 이방인 화가였던 두 사람이 23년 만에 재회했다. 유네스코 창설 70주년 기념 특별전시회에 초대받아 ‘제3의 현실’이란 주제로 18일까지 2인전을 열게 된 것이다. 15일 파리 유네스코 본부에서 열린 개막식에서 왕두는 “10년 넘게 파리의 광장과 거리는 우리의 ‘사무실’이었다며 ”우리를 ‘에펠탑 학파’로 불러달라“고 말해 좌중에 웃음을 던졌다.

●가난한 거리의 화가, 예술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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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6월 중국 천안문 사태가 터졌을 때 왕두는 반체제 시위에 참가한 혐의로 당국에 의해 긴급체포됐다. 그는 광저우 미술대학을 졸업한 후 중국의 기성체제에 도전하는 전시회와 사회문제를 비판하는 강연회를 수차례 개최해 당국의 감시를 받아온 요주의 인물이었다. 결국 9개월 동안 감옥에 갇힌 왕두를 구하기 위해 국제 인권단체와 미술가들이 움직였다. 그는 결국 광저우에서 만난 프랑스 여기자와의 위장결혼을 통해 극적으로 파리로 망명하는 데 성공했다.

1989년 당시 한 화백은 서울 이화여대 앞에서 미술학원 원장을 하고 있었다. 3년 전에 시작한 학원은 번창했다. 33만원의 월 강습료를 내는 수강생만 30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를 가르치고, 돈을 벌고, 안정된 삶을 살게 될 수록 마음 속 한구석이 허전했다. 화가로서 자신의 그림을 전혀 그리지 못하고 있던 것. 결혼해서 자녀까지 있는 30대 중반의 가장이었던 그는 모든 익숙하고 안정된 삶을 버리고 파리로 떠났다.

파리에 도착한 한 화백은 문자 그대로 ‘길바닥 위’에서 다시 시작했다. 파리의 몽마르트 언덕은 예술가들이 당국의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곳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가난한 이민자 화가에게까지 기회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노트르담 성당 앞 광장이나 에펠탑 앞 등 가능한 곳이면 어디든 화구를 펼쳐놓았다. 때때로 경찰의 단속에 벌금을 물어야 했지만, 약 10년 동안 거리에서 생계를 해결하며 예술가로서의 꿈을 키워나갔다.

거리의 화가의 수입은 쏠쏠했다. 여름휴가철 등 3개월만 일해도 1년을 먹고 살 수 있었다. 당시 프랑스 최저임금 근로자의 한달 소득이 4000프랑(약 82만원)이었는데, 관광객이 몰려드는 날에는 하루에 4000프랑을 벌기도 했다. 두 사람은 돈을 벌 수도 있었지만, 여름철 3개월만 일하고 나머지 9개월 동안에는 자신의 작업에 몰두했다.

한 화백은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비로소 자신을 얽매어왔던 체면과 관습을 벗어던질 수 있었다. 그는 또한 초상화 화가를 단순히 생계를 위한 작업이 아니라 전세계인들의 다양한 인체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탐구하는 기회로 삼았다. 그는 신체의 일부분을 마치 풍경화처럼 투명하고도 몽환적으로 표현해내는 독특한 인물화 화법으로 프랑스 화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날 유네스코에 전시된 그의 작품인 ‘기원의 뒷면’은 가장 에로틱(性)하면서도, 성(聖)스러운 인간의 몸에 대한 작가의 성찰이 구도(求道)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주었다. 개막식에 참석한 유네스코 직원과 관람객들은 ”수없이 바라봐도 새로운 느낌이 나는 작품“이라며 찬사를 보냈다.

한 화백은 또한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한국 현대화가들의 모임인 ‘소나무회’를 이끌며 국제적인 예술교류 작업을 주도해왔다. 소나무회는 1992년 파리 교외의 이씨레물리노시(市)가 한국인 화가들에게 작업실로 제공했던 군수공장 터에서 태동했다. 이 공장에는 한국 화가 뿐 아니라 미국, 프랑스, 영국, 독일, 중국, 베트남 작가 등 50여 명이 상주하며 서로 예술적 영감을 주고받는 전시회를 시도해왔다.

한 화백이 기억하는 ‘거리의 화가’ 왕두에 대한 에피소드 2가지.

에펠탑 앞에서 그림을 그릴 때 경찰이 단속을 해도 왕두는 좀처럼 도망가지 않고 태연하게 그림을 그렸다. 경찰이 당신들 뭐하는 사람이냐고 묻자, 왕두는 ”아티스트“라고 당당히 대답했다. 경찰이 이에 ”당신이 아티스트면 파리는 예술가로 가득 찼다“며 비웃었다. 그러나 왕두가 ”그거 잘됐군, 파리가 경찰로 가득찬 것보다 훨 낫네!“라고 응수하자 경찰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떠나갔다고 한다.

하루의 일과가 끝나면 동료 화가들은 생 미셸 광장 인근의 맥줏집에서 밤새 술을 마셨다. 술값이 몇 천 프랑이 나올 정도였다. 당시 중국 출신 화가들은 술자리에 잘 어울리지 못했다. 초상화 한 점의 가격 200프랑이 당시 중국에서는 황소 한 마리 값에 해당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두는 한국 화가들이 두 번 정도 술을 사면, 자기가 꼭 한 번씩 샀다. 그는 ”무척 큰 돈이었지만, 홍수에게 자존심에서 질 순 없었다“며 웃었다.

●세계적 화가로 뜬 이후…, 노블레스 오블레주

왕두는 199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21명의 중국의 현대미술작가로 초청되면서 세계 미술계의 뜨거운 관심을 받게 됐다. 1989년 중국 공산당의 억압적 체제에 항거했던 천안문 사태가 오히려 중국 현대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된 것이다. ‘후(後) 89예술’로 불리는 왕두, 황용핑, 차이궤창, 쉬방, 천단칭 등의 작가들이 유럽과 미국으로 망명해 해외에 알려지면서 중국 현대미술의 1세대 작가로 떠올랐다. 서구의 미술계는 ‘죽(竹)의 장막’을 뚫고 나타난 중국 작가들의 정치적 팝과 냉소적 현실주의에 열광하기 시작했다.

특히 왕두는 신문 잡지 등 미디어에 나타난 이미지를 3차원 조각품으로 표현해내는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풍자가 담긴 조각품으로 유럽과 미국에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 그는 이번 유네스코 전시회에서도 작품 하나당 600kg에 이르는 대규모 청동조각품 3점을 선보였다. 영어, 아랍어, 러시아어로 된 종이신문이 구겨져 길에 버려진 모습을 조각작품으로 재현했다.

왕두의 작품은 파리, 뉴욕 뿐 아니라 한국에서도 널리 알려졌다. 김기덕 감독의 영화의 한 장면을 조각으로 표현한 왕두의 ‘키스’는 프랑스 퐁피두센터에 소장돼 있다. 지난달에는 광주 아시아문화예술의전당이 7m 높이의 ‘빅토리’라는 왕두의 작품을 설치하기도 했다. 왕두는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을 계기로 중국 본토에서도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중국 정부와 빚었던 정치적 갈등도 해소했다.

이번 유네스코가 창립 70주년 기념특별전에 왕두와 한 화백을 초청한 것은 중국과 한국, 프랑스와 유럽의 국경을 초월하는 두 사람의 ‘열린 예술성’에 주목한 것이다. 세계시장에서 각광받는 중국의 현대미술은 중국의 이미지를 날 것으로 드러내 배타적인 ‘중화(中華)주의’를 느끼게 할 때도 많다. 그러나 왕두의 작품은 보다 유럽적인 보편성을 갖고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대사회를 비판하는 글로벌한 감각을 추구한다. 20년 넘게 프랑스 작가로 활동해 온 왕두는 ”나는 중국인도 아니고, 프랑스인도 아니며, 그냥 왕두“라고 스스로 정체성을 밝혀왔다.

왕두는 2000년대 이후 세계적인 조각가로 명성을 날리면서 더 이상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지 않아도 됐다. 무명 작가에서 일약 스타로 발돋움하면 자신의 올챙이적 시절의 ‘흑(黑)역사’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가능한 피하는게 인지상정이다. 또한 ‘사촌이 땅이 사면 배가 아프다’는 한국의 속담처럼 성공한 사람에 대해서는 박수를 쳐주기 보다는 시기하고 헐뜯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왕두는 스케일이 달랐다. 그는 20여년 전부터 거리에서 함께 그림을 그렸던 옛 동료들을 잊지 않고 챙기면서 예술적인 작업을 함께 해왔다.

파리 교외의 알포르빌에 있는 대형 공장을 개조한 왕두의 아뜰리에에는 중국과 유럽출신 젊은 작가들이 5~6명이 늘 숙식을 함께 한다. 왕두는 자신의 작업을 돕는 예술가 지망생들에게 학비, 장학금까지 지원해준다. 왕두의 화실은 중국출신 신진작가들의 장학 기숙학원이자 예술가들의 국제적인 교류의 장이었다.

이는 해외로 진출한 중국인 네트워크의 특징이기도 하다. 먼저 자리잡은 교민들이 후발주자가 자립할 때까지 지원하며 지역의 상권을 장악하는 중국인들의 연대의식은 유명하다. 예술시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재불 중국화가들의 경우 양페이밍(嚴培明) 디종국립예술학교 교수를 중심으로 화랑, 평론가, 기획자로 구성된 신진작가의 국제적인 활동을 도와주는 네트워크 잘 구축돼 있다. 왕두는 한 화백과도 ”일회적인 전시에 그치지 않고 중국, 한국, 유럽에서 순회전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혔다.

한 화백이 수년 전 소나무회의 회장을 맡게 된 이유도 중국 예술가들의 국제적활동을 지원하는 네트워크에서 큰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 화백은 지난달 소나무회 작가들과 밤새 통음(痛飮)을 하며 이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작가들은 세계 미술시장에서 중국 자본의 영향력이 큰 것이 사실이지만, 돈보다는 우선 남의 성공에 대해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도록 우리의 마인드가 바뀌어야 한다는 지적을 했다. 한 화백은 ”소나무회를 국제적인 네트워크로 키워 성공한 사람들은 후발주자를 이끌어주는 ‘노블레스 오블레주’를 실천하는 모임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파리=전승훈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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