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의 역사/니콜라스 A 바스베인스 지음/정지현 옮김/524쪽·2만7000원·21세기북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한 독일인이 가치가 폭락한 지폐를 벽지로 바르고 있다. 당시 엄청난 인플레이션으로 지폐로 벽지를 사는 것보다 지폐를 벽지로 쓰는 것이 더 저렴했다. 21세기북스 제공
중국 한나라 때인 서기 105년 채륜이 발명한 종이가 곧 세계 곳곳에 퍼져 인류 문화의 정수를 담는 기록 수단이 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동쪽으로 한국과 일본에는 비교적 빨리 전파됐지만 서쪽으로 이슬람 세계를 거쳐 유럽에 다다르기까지는 스페인 12세기, 이탈리아 13세기 등 무려 1000년 넘게 걸렸다. 유럽 입장에서 보면 종이의 전래는 르네상스의 원동력이었고 이후 종이가 대량생산되면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생겨날 수 있었다. H G 웰스는 저서 ‘세계사 대계’(1920년)에서 “종이가 유럽의 부활을 가능케 했다”고 언급했다.
이 책은 2000여 년에 걸친 종이의 역사를 비롯해 종이로 인한 인간 생활과 문화의 변화를 촘촘히 담았다. 이 책은 특히 우리가 종이에 대해 잘못 알거나 선입견에 빠진 점을 바로잡아 준다.
총알과 폭탄이 난무하는 전쟁은 종이와 별 상관없을 것 같지만 1857년 제1차 인도독립전쟁(세포이항쟁)은 종이에서 비롯됐다.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용병인 힌두교도와 이슬람교도들에게 돼지나 소의 기름을 묻힌 종이 탄약통을 입으로 찢어 쓰도록 하자 이에 반발해 촉발된 것이다. 힌두교도에겐 소가 신성했고 이슬람교도에겐 돼지가 금기시되는 동물이라 이를 입에 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 2차 세계대전은 ‘종이 전쟁’이라 할 만했다. 1차 대전 때 연합군은 하루 100만 장의 종이 전단(삐라)을 열기구에 띄워 독일군에게 뿌렸고 이는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새로운 무기였다. 2차 대전에서도 이탈리아 작전을 펼칠 때 연합군은 한 달에 1억 장을 뿌렸고 독일도 마찬가지였다.
종이 중 값어치 있는 것은 지폐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꼭 그렇진 않다. 1차 세계대전 이후 살인적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던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 국민들은 지폐를 벽지로 사용했다. 벽지를 살 돈, 즉 지폐를 벽에 바르는 것이 벽지를 사는 것보다 훨씬 경제적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1776년 7월 4일 발행된 1장짜리 ‘미국 독립선언문’ 원본은 814만 달러에, 르네상스 시대 화가 라파엘로가 그린 스케치는 2009년 4790만 달러에 경매됐다.
종이는 훌륭한 기록 수단인 만큼 비밀이 담겼을 경우 파괴의 대상이기도 하다.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는 동독 붕괴 직전인 1989년 10월부터 3개월간 4500만 장의 비밀문건을 파쇄했지만 미처 소각하기 전에 적발됐다. 한 업체는 종이의 질감 모양 두께 활자체 등을 분석해 파쇄한 종이를 잇는 기계를 만들어 문건을 한창 복원 중이다. 미국 국가안보국은 아예 하루 12t의 파쇄용 기밀문서를 펄프로 만들어 피자 상자, 계란판으로 재활용하는 공장을 갖고 있다.
9·11테러 당시 건물이 무너지며 먼지와 함께 거리에 쏟아져 내린 수많은 종이 중 하나를 주워 한 시민이 읽고 있다. 이는 현대사회에서 종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각각 이슬람 세계와 일본에서 종이를 만들던 모습(왼쪽부터). 21세기북스 제공이 책의 마지막 장은 종이와 9·11테러를 다루고 있다. 당시 건물이 붕괴할 때 먼지와 함께 태양을 가릴 정도로 수많이 종이가 쏟아졌다. 그만큼 현대 사회에서 종이를 얼마나 많이 쓰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당시 발견된 한 메모에는 ‘84층 서쪽 사무실에 12명이 갇혀 있다(84th floor west office 12 people trapped)’라고 적혀 있었다. 누군가가 84층의 위급한 상황을 알리며 구조를 해달라며 빌딩 밖으로 던진 것이었다. 이 메모를 한 안전요원이 발견했을 때 이미 무너진 북쪽 빌딩에 이어 남쪽 빌딩이 붕괴하기 시작했고 84층은 흔적 없이 사라졌다. 10년간의 추적 끝에 메모의 필체가 84층의 한 금융업체 직원의 필체와 같다는 것이 확인됐다. 종이 쪼가리에 불과할 수 있었던 메모지가 이젠 유족들의 소중한 유품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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