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메탈릭 소재의 재킷에 속옷처럼 짧은 팬츠를 매치한 마크 제이콥스, 복서에서 영감을 받은 알렉산더 왕, 검은색 리본과 러플 블라우스를 많이 선보인 랄프 로렌. 인터패션플래닝 제공
요즘처럼 디자이너들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던 시기가 있었을까. 스타 디자이너야 언제나 있어왔지만 요즘은 좀 다르다. 인터넷 시대의 디자이너는 역사가 짧아도 금세 붐을 일으킬 수 있다. 직접구매(직구)가 성행하기 때문에 패션위크에서 주목을 받은 디자이너는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기도 쉽다.
뉴욕 디자이너들은 특히 자신의 명성과 창조적인 디자인, 상업적인 성공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능력으로 유명하다. 역사와 전통에 얽매이지 않고 컨템퍼러리(동시대)적인 감각을 맘껏 풀어낸다. 혜성처럼 나타나 전 세계 ‘직구인’(해외에서 직접 구매하는 소비자)들의 마음을 뒤흔드는 이도 많다. 늘어나고 있는 편집매장 바이어들의 눈도 날카로워진다.
A style은 이달 초 진행된 2013 가을겨울 뉴욕 패션위크를 다재다능한 디자이너들의 행보에 초점을 맞춰 정리해봤다.
알렉산더 왕
긴 머리를 휘날리는 29세 청년. 원래부터 인기인이었지만 올해는 더욱 부담감이 컸을 것이다. 프랑스 패션 하우스 ‘발렌시아가’의 부흥기를 이끈 천재 디자이너 니콜라 게스키에르의 뒤를 잇게 됐다는 뉴스가 온 세상에 퍼진 뒤에 자신의 패션쇼를 선보여야 했으니 말이다. 평소에 관심 없던 사람들마저 ‘얼마나 잘하는 디자이너인지 보자’라고 작심하고 알렉산더 왕에게 주목했다.
그가 뉴욕 패션쇼의 음악으로 택한 음악은 ‘아이 오브 더 타이거(호랑이의 눈)’. 영화 ‘록키3’의 음악이다. 이윽고 복서처럼 동그란 장갑을 낀 모델이 등장했다. 다만 소재는 가죽이 아니라 퍼(털)였다. 신발은 니트 토시가 덮었고, 모델들의 머리에는 동그란 니트 모자가 씌워져 있었다. 왕은 진짜 머리칼처럼 부스스하게 보이게 하려고 니트 모자에 빗질을 했다고 한다. 스타일닷컴은 왕의 2013 가을겨울 컬렉션에 대해 “소재가 중시되는 트렌드(믹스앤드매치, 혁신적인 소재에 대한 실험)를 새로운 세계로 끌어올렸다”고 평했다.
반면 뉴욕타임스의 패션 칼럼니스트 캐시 호린은 “여러 요소를 섞는 능력은 비상하지만 전체적인 스타일이 무겁게 느껴진다”며 “일부 패브릭은 너무 두꺼워서 소파 덮개처럼 보인다”고 비판했다.
각진 어깨가 돋보였던 톰 브라운의 컬렉션. 인터패션플래닝 제공톰 브라운
톰 브라운은 한국에서 두 사람 때문에 대중적으로 유명해졌다. 바로 배우 장동건과 미국의 퍼스트레이디 미셸 오바마 여사다. 장동건은 드라마 ‘신사의 품격’에서 이미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고 있는 톰 브라운의 남성 라인을 한국에 소개하는 역할을 했다. 미셸 여사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에서 톰 브라운 코트를 입어 있는지도 몰랐던 그의 신생 여성 라인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했다.
마침 뉴욕 패션위크가 오바마 대통령의 취임 직후에 열려 역시 기대감을 모았다. 하지만 미셸 여사의 코트처럼 여성스러운 스타일을 기대한 사람이라면 조금은 실망할 수도 있겠다. 그의 이번 컬렉션은 한 편의 연극 같다는 평을 받았다. 화장도 머리 장식도 모두 일부러 과장되게 표현했다. 특히 로봇처럼 높게 올라온 각진 어깨는 신선한 충격을 줬다. 당장 입을 수 있는 옷이 주를 이루다 보니 다소 지루할 수 있는 뉴욕 패션위크에서 그의 사각어깨 실험정신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는 평을 받았다.
마크 제이콥스
마크 제이콥스는 올해 거대한 인공 해를 무대에 올린 것만으로 이미 화제의 중심에 섰다. 올해 봄여름 루이뷔통 컬렉션에서 ‘쌍둥이’ 콘셉트로 모델들이 짝을 지어 런웨이를 걸어 화제가 됐듯이 이번 뉴욕 패션쇼에서는 서클 모양의 무대 위에 동그란 해를 띄워 화제가 된 것이다. 그는 이번 패션위크에서 컬렉션 일정을 갑자기 사흘이나 미뤘다. 비행기 스케줄을 바꿔야 하는 바람에 불만에 가득 찼던 기자들과 바이어들이 둥근 해를 보고 화를 풀었다는 후문도 있다.
일각에서 그가 선보인 ‘하의 실종’ 브리프 패션(바지가 짧다 못해 여성 속옷처럼 보인다)은 프라다를 연상시킨다는 지적도 있지만 파자마 같으면서도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메탈릭 소재는 ‘역시 마크 제이콥스다’라는 말이 나오게 한다는 평이 주를 이뤘다.
그의 쇼에서 주목할 또 다른 특징은 ‘가방을 드는 자세’다. 요즘 옷 좀 입는다 하는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취하는 포즈가 집대성돼 있었기 때문이다. 핸드백은 절대로 어깨에 메지 않는다. 끈을 돌돌 말아 한손에 쥐거나 클러치 백처럼 옆구리에 끼고 코트 앞섶을 모으고 걷는 바로 그 자세를 쇼에서 볼 수 있었다.
랄프 로렌
봄여름 컬렉션에서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던 랄프 로렌의 패션은 이번 가을겨울에는 러시아에 안착했다. 블라우스의 칼라가 목 위로 높게 올라왔고 아름다운 러플이 달렸다. 목에는 검은 리본을 매고, 허리까지 올라오는 팬츠를 입어 전체적으로 우아한 스타일을 연출했다. 로이터통신은 가을겨울 시즌 그의 패션에 대해 “영화 ‘안나 카레니나’와 ‘레 미제라블’을 연상시킨다”며 “러시아 황실과 19세기 프랑스 파리가 녹아 있다”고 평했다. 하지만 역시 랄프 로렌의 본질은 미국이라는 평이 주도적이다. 우아하고 화려하지만 모자 때문에 캐주얼한 분위기도 난다. 우아한 벨벳 드레스를 입을 때에도 머리에 니트 모자를 써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체크무늬의 유행 예감을 불러일으킨 3.1 필립 림. 인터패션플래닝 제공3.1 필립 림
알렉산더 왕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진 않지만 새로운 듯하면서도 누구나 시도할 수 있는 옷이라 국내에서도 많은 사랑을 받는 디자이너다. 거침없는 독설 칼럼으로 유명한 뉴욕타임스의 캐시 호린은 “수많은 디자이너들이 자꾸 과거에서 영감을 찾는 척하며 아이디어가 부족한 것을 숨긴다”며 “필립 림은 적어도 현재에 충실하고 아무도 속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림은 올해 바이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다양한 색깔의 천을 이어붙이는 ‘패치워크’도 이번 시즌 컬렉션의 특징으로 꼽힌다. 무릎까지 올라오는 가죽 샌들도 빼놓을 수 없다. 무엇보다 화사한 색감의 가죽 재킷, 거대한 사이즈의 양털 코트는 올해 가을겨울 한국의 길거리에서도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래그&본
요즘 해외 사이트를 뒤지는 한국 소비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브랜드가 아닐까. 재미있게도 뉴욕스러운 브랜드인 래그&본을 이끄는 듀오 디자이너는 영국 출신이다. 마커스 웨인라이트와 데이비드 네빌이 그 주인공이다.
올해 가을겨울 컬렉션을 관통하는 주제는 ‘에비에이션’. 비행기 조종사들이 입던 빈티지 조종 슈트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고 쇼를 거친 느낌으로 이끌지 않았다. 비행기를 타는 것 자체가 엄청난 기회이던 시절, 사람들이 멋진 옷을 입고 공항에 왔던 시절을 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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