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지식인’ 성호 이익 서거 250주년]<1>인간 성호의 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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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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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와 다산 잇는 조선학맥의 위대한 허리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는 성호 이익의 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경기 안산시 상록구 일동에 있는 성호 이익의 묘.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홈페이지
《 조선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星湖 李瀷·1681∼1763)이 올해 서거 250주년을 맞았다. 성호는 조선 성리학의 최고봉인 퇴계 이황(1501∼1570)의 학통을 이어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으로 정립했다. 이후 다산 정약용(1762∼1836)이 성호의 사상을 토대로 조선 실학을 집대성하게 된다. 성호는 오늘날 퇴계와 다산에 비해 덜 알려졌지만 조선 학맥의 ‘허리’ 역할을 한 대표적 학자다. 특히 서양의 지식을 적극 수용하고 개방적 학문 태도를 지녔던 그는 경제 정치 천문 지리 과학 경학 문화 역사 문학 등 다방면을 아우르는 백과사전 ‘성호사설’을 펴냈다. ‘열린 지식인’ 성호의 삶과 사상, 그리고 21세기에도 유효한 그의 개혁 사상을 5회의 기획 시리즈로 싣는다. 동아일보는 지난해 다산 탄생 250주년을 맞아 10회에 걸쳐 그 사상을 재조명한 바 있다. 》
올해 서거 250주년을 맞은 조선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초상.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을 연결하는 조선 학맥의 ‘허리’ 역할을 했던 그는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에 맞선 개혁적 성향의 학자였다. 실학박물관 제공
올해 서거 250주년을 맞은 조선 실학의 선구자 성호 이익의 초상. 퇴계 이황과 다산 정약용을 연결하는 조선 학맥의 ‘허리’ 역할을 했던 그는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에 맞선 개혁적 성향의 학자였다. 실학박물관 제공
위대한 학자가 태어나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건이 갖추어져야 한다. 바로 사우(師友·스승과 벗), 자질, 경제력이다. 여주 이씨로 남인계 관료 집안에서 태어난 성호는 이 조건을 모두 갖췄다. 성호의 증조부 이상의의 직계 5대 내에는 과거 합격자가 55명에 이르렀다. 성호의 부친 이하진은 남인 정권의 실세로 사헌부 대사헌, 사간원 대사간 등을 지냈고 서울 정동에 저택을, 경기 안산에 논밭을 갖고 있었다. 이하진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다녀올 때 임금의 격려금인 은사금(恩賜金)으로 책을 많이 사왔는데, 이 책들은 성호가 실학자로 성장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성호의 삶은 태어날 때부터 순탄치 못했다. 1680년 숙종 대에 경신환국으로 남인이 패배하자 성호의 아버지는 평안도 운산으로 유배되었다. 유배지에서 태어난 막내아들이 성호였고, 이듬해 아버지는 숨을 거뒀다. 성호는 선영이 있는 경기 안산 첨성리로 와서 형 이잠, 이서, 이진 등에게서 글을 배웠다. 1705년 성호는 과거에 응시해 초시(1차 시험)에 합격했으나 답안지에 이름을 격식에 맞지 않게 썼다는 이유로 회시(2차 시험)를 치를 수 없게 된다. 이어 1706년 형 이잠이 세자(경종)를 지지하다 죽임을 당하자 벼슬길을 포기하기에 이른다.

이후 성호는 안산의 집 성호장(星湖莊)에서 어머니를 모시고 은거하며 평생 학문에만 정진했다. 초기에는 어머니 덕분에 생활이 그런대로 괜찮아 공부에 지장이 없었다. 성호는 양반으로 태어나 노비에게 농사를 짓게 하거나 심부름을 시키고, 밖에 나갈 때 말을 타고 다닐 수 있는 것을 감사히 여겼다. 그러나 1715년 어머니가 죽자 모든 재산이 종가로 귀속되어 무척 가난하게 살았다. 몰락한 남인 가문에서 태어나 공부밖에 할 것이 없었던 그는 자연스럽게 비판적 개혁적 시각을 갖게 됐다. 원래 병약했던 성호는 60대 이후 등과 가슴에 악성 종기가 심해져 고생했다. 병을 다스리는 동안 집안이 경제적으로 기울어 쇠락한 말년을 보냈지만 끝까지 학문을 놓지 않았다.

성호는 학자의 자질을 타고났다. 어린 시절 몸이 약해 열 살이 되어서야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괴이한 행동을 하지 않았고, 이름을 내는 일을 싫어했다. 매일 일찍 일어나 의관을 정제하고, 가묘에 나아가 배알하고, 책을 읽을 때도 바른 자세를 취하고, 세수한 뒤에는 물기가 한 점도 없었으며, 지팡이는 일정한 곳에 두었고, 하루 일과가 일정했다. 상가에는 귀천을 막론하고 꼭 문상했으며, 편지를 받으면 반드시 답장을 했다. 제자를 가르칠 때는 정성스럽게 정도에 따라 교육했고, 출입할 때나 손님을 맞을 때 정중히 인사를 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성호의 제자들은 관직에 나가서도 인사를 잘하기로 유명했다. 성호는 6경(六經)과 자사(子史), 소소한 만록(漫錄)에 이르기까지 읽지 않은 책이 없었으나 불서(佛書), 도가서(道家書), 소기(小技)에 속한 책, 패관잡설(稗官雜說)은 읽지 않았다.

성호는 퇴계를 사숙(私淑·직접 가르침을 받진 않았으나 마음으로 본받아 학문을 닦음)했다. 성호의 조카 이병휴는 “퇴계 학통을 이어받은 사람은 오직 성호뿐” “퇴계가 공자라면 성호는 주자”라고 했다. 성호는 ‘이자수어(李子粹語)’ ‘이선생예설(李先生禮說)’ 등 퇴계에 관한 책을 썼고, 도산서원을 찾아가 사모와 존경을 표했다. 또 실무(實務)에는 율곡 이이와 반계 유형원을 본받았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노론의 지나친 주자학 지상주의와 존화주의(尊華主義)를 배격하고, 밖으로는 서학과 청대 고증학을 수용해 자주적 실학정신을 개발하는 데 힘썼다. 그의 학문은 많은 지식인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윤동규 안정복 황덕일 허전으로 연결되는, 현실 비판과 자의식 고양에 치중한 ‘성호우파’와 이병휴 권철신 정약용으로 연결되는, 서학과 천주교에 경도된 ‘성호좌파’로 갈렸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 성호학회장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 성호학회장
성호의 학문은 주자와 퇴계를 배우는 데서 출발했다. 따라서 그는 기본적으로 유학자였다. 그러나 노론에 의해 주자학을 지나치게 이념적 도그마로 몰고 가는 것을 반대했다. 그러자니 자연히 고대 유교로 돌아가고자 했고, 이에 근거해 경전 해석도 독창적으로 하게 됐다. 불합리한 제도나 관행은 과감히 개혁하고자 했다. 천주교를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종교적으로는 교리의 일부를 이해할 수 있다고 함으로써 그의 문하에서 천주교 신도가 나와 박해를 받기도 했다.

성호의 개혁사상은 21세기 동아시아의 새로운 가치관을 정립하는 데 유효하다. 유교에 바탕을 두되 서학 양명학 고증학을 수용한 성호학은 새로운 한국적, 동아시아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

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전 국사편찬위원장 전 성호학회장
#성호 이익#조선학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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