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곡미술관 내일의 작가’ 수상기념전에서 선보인 한국화가 김범석 씨의 ‘고달사지 1’. 서울을 떠나 경기 여주군에 터를 잡은 작가는 자신이 직접 보고 겪은 일상의 풍경과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산 그림을 통해 풀어냈다. 성곡미술관 제공
그림 대신 세 줄의 문장만 달랑 담겨 있다. ‘파란 하늘을 바라보라. 나무들을 보라. 흐르는 강물을 보라.’ 풍경을 모티브로 한 김범 씨 작품이다. 그의 또 다른 작업은 현관 열쇠의 옆면을 그대로 베껴낸 그림이다. 제목만 감추면 그럴듯한 산수화 같다. 로댕의 ‘지옥의 문’ 앞에 커튼처럼 매달린 은색 비닐 다발과 사냥할 때 발생하는 사운드를 결합한 작품은 김소라 씨의 ‘풍경’이다. 응원용 꽃술 같은 은빛 다발을 보며 암벽이나 폭포수를 상상하는 것은 관객 마음이다. 나무 리본을 구불구불 겹쳐놓은 듯한 조형물은 추상적으로 보이지만 그물망 같은 교차로를 표현한 김동연 씨의 작품이다.
서울 중구 태평로 삼성생명 빌딩 1층 플라토미술관에서 내년 2월 3일까지 열리는 ‘(불)가능한 풍경’전은 통념적인 풍경과 산수를 부정하는 작품들을 모은 자리다. 강홍구 공성훈 이불 등 작가 13명이 내놓은 회화 사진 조각 설치 영상 30점은 ‘풍경에 대한 사유’가 유일한 공통분모다. 미술사의 가장 오래된 장르 중 하나인 ‘풍경’을 오늘날의 현대미술이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폭넓은 스펙트럼으로 만날 수 있다.
이보다는 덜 생경하지만 서양의 풍경화와 동양의 산수 등 낡고 철 지난 유행가처럼 여겨졌던 장르를 재해석한 서양화가 서용선 홍순명 한국화가 김범석 류근택 씨의 전시도 흥미롭다. 각자의 개성이 묻어나면서도 오래된 테마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를 비교 감상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을’이 아닌, ‘어떻게’ 표현하는지에 따라 풍경이든 산수든 재해석과 진화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한다.
○ 풍경의 재구성, 이면의 기록
자신의 몸으로 체험한 이 땅의 산을 그리는 서용선 씨의 ‘태백, 삼수령에서’. 리씨갤러리 제공역사와 현실에 관심을 집중해온 서용선 씨(61)는 2008년부터 자연에도 눈을 돌렸다. 22일까지 서울 동산방 화랑과 리씨갤러리에서 동시에 열리는 ‘서용선의 풍경’전은 그 4번째 결실이다. 아크릴물감과 붓을 사용하지만 그가 몸으로 읽어낸 오대산 지리산 등 이 땅의 풍경은 우주의 질서와 구조를 담으려 한 전통 산수와 접점을 드러낸다. 기교에 기대기보다 어눌한 듯 활달한 붓질에서 문인화의 표현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서울 종로구 안국동 사비나미술관이 기획한 홍순명 씨(53)의 ‘Sidescape’전은 발로 답사한 풍경 대신에 웹과 인쇄물을 통해 접한 보도사진 중 구석에 감춰진 소소한 풍경을 채집해 보여준다. 군함의 한 부분이 기념상처럼, 폭발사고 장면이 일출의 장관처럼 보이는 등 뉴스 가치가 사라진 이미지는 모호한 색채와 섬세한 붓질을 통해 회화적 풍경으로 새롭게 태어난다. 사람들 시선에서 빗겨나 있지만 분명 존재하는 풍경에 대한 재발견, 세상의 이면에 대한 질문을 녹여낸 작업이다. 12월 9일까지.
○ 산수의 재구성, 내면의 기록
지필묵을 사용하는 김범석 류근택 씨의 그림은 전통을 현대적으로 계승한 한국화로서 풍경과 산수 사이 새로운 길을 탐색한다. 서울 종로구 신문로의 성곡미술관에서 12월 16일까지 열리는 김범석 씨(49)의 ‘산전수전’전은 작품의 내실과 더불어 자신의 내면을 일기처럼 기록한 엄청난 작업량으로도 관객을 압도한다. 그는 관념적 산수에 대한 피로감을 덜어내고 여주 작업실 주변의 자연과 삶을 하나의 풍경으로 버무려 냈다. 조개껍데기를 빻아 만든 호분을 적절히 활용한 풍경의 파노라마가 웅장하다.
류근택 씨(47)의 ‘하루’전은 서울 종로구 사간동 갤러리 현대 본관에서 12월 9일까지 열린다. 지난 1년 안식년으로 미국에 머물렀던 작가 역시 전통의 틀에 갇히지 않는다. 일상의 현실과 시간성이 묻어나는 풍경의 에너지와 본질을 자유롭게 표현했다.
케케묵은 장르적 관습에서 벗어난 옹골찬 전시들은 풍경이 당대적 관심사로 부각하는 이유를 돌아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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