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죽어도 3할 못치는, 2할 8푼짜리 폼은 버리시오” 한마디에…

  • 동아일보
  • 입력 2012년 9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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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을 바꾼 순간- 백인천이 일본에서 3할을 친 날

한국 프로야구 4할 타율을 기념해 제작된 방망이를 들고 있는 백인천. 그는 “프로는, 야구는 절대 즐기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한국 프로야구 4할 타율을 기념해 제작된 방망이를 들고 있는 백인천. 그는 “프로는, 야구는 절대 즐기는 게 아니다”라고 했다. 박경모 전문기자 momo@donga.com
《 3학년들이 보고 난 야구잡지 ‘야큐카이(野球界)’가 손에 들어왔다. 감독 선생님이 매달 일본에서 구입해 보던 것이었다. 표지에는 일본 대학야구 최고 스타인 릿쿄(立敎)대의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후에 야구의 천황이라 불린 일본 야구의 거목)가 방망이를 들고 서 있었다. 멋있다.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 탄식처럼 입에서 튀어나온 말, “나가시마랑 같이 야구해야지.” 듣고 있던 1년 선배가 “에라” 하며 머리를 쿵 쥐어박고는 외쳤다. “야, 이 바보 좀 봐라. 자기가 나가시마랑 야구하겠단다.” 주위 선배들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1956년, 서울 경동중 2학년 야구부 포수 백인천(70). 6년 뒤 그는 나가시마와 같은 그라운드를 밟고 서게 됐다. 》
○ 그 하루

1972년 3월, 오랜만에 연습이 없는 휴일이었다. 도쿄(東京) 다마가와(多摩川) 2군 합숙소 근처에 백인천의 아파트가 있었다. 두 아이를 데리고 바람이나 쐬러 갈까 했다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이따 저녁이나 같이 먹자” 하고는 야구 방망이를 들고 홀로 집을 나섰다. 일본 프로야구팀 도에이(東映) 플라이어스(현 니혼햄 파이터스) 주전으로 자리 잡은 지 어언 7년. 그러나 훈련장으로 향하는 그의 마음은 무거웠다. ‘올해는 이렇게 2군에서 시작인가.’

새로 부임한 스기야마 사토시(杉山悟) 타격코치가 그에게 타격할 때의 스윙 방식을 바꾸자고 넌지시 제안한 것은 두 달여 전이었다. “하쿠(백·白의 일본 발음) 상은 분명히 3할을 칠 수 있는 타자다. 내 주문대로 한번 해보지 않겠는가?” 그때까지 백인천은 평균타율 2할 8푼대 타자였다. 3할은 못 쳐봤지만 리그에서 타격 9위까지 올라봤다. 만족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3할은 치겠다고 해서 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금 방식으로도 2할 8푼은 치겠지만 그건 아니라는 거야. 스기야마 코치가 (바꾼 것에 대해서는) 자기 목숨을 걸고 책임을 지겠다는 거예요.”

낮게 들어오는 공을 더 잘 치기 위해 방망이를 잡은 손의 위치를 머리 옆에서 가슴 아래까지 끌어내렸다. 일반 타자로서는 매우 힘든 자세였지만 힘이 좋았던 그에게는 맞춤형 자세였다. 하지만 공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너무 맞지 않으니 1군에서도 빠져 혼자 배팅 연습을 해야 했다. 매일매일 손이 엉망이 될 정도로 방망이를 휘둘렀지만 공은 뻗어 나가지 않았다. 정규리그 개막은 다가오고 그의 속은 바짝바짝 타들어 가던 터였다.

2군 훈련장에는 연락도 하지 않았는데 스기야마 코치가 와 있었다. 마침 1군 시범경기도 없는 날이어서 우연히 나와 본 것이었다. 옆에 있던 2군 매니저가 하루도 빠짐없이 연습을 하던 백인천이 안쓰러워 힘을 북돋우려 했는지 “아주 잘 맞고 있습니다. 하쿠 상, 한번 보여 드려요”라고 했다. 어쩔 수 없이 타석에 들어서서 트레이너가 던지는 볼을 상대했다.

이게 웬일인가. 그토록 못 맞히던 공을 팡팡 쳐냈다. 직구든 변화구든 가릴 것이 없었다. 스기야마 코치는 “완벽하다”고 연신 탄성을 발했다. 다음 날 바로 1군으로 올라가 시범경기에서 홈런 2개를 쳐냈다. “내가 더 놀랐어요. 나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고. 이게 꿈인가 했지요.” 그는 리그 첫 경기에서 또 홈런을 쳤다. 그리고 그해 처음으로 3할(0.315·리그 3위)을 쳤다. ‘그날’이 만들어낸 마술 같은 일이었다.

“이제 끝이다 했는데 몸 전체가 ‘이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한 것 같아. 운이라기보다 한 가지 목표를 가지고 죽 했기 때문에 이뤄진 것이 아닌가 싶어요.”

자기가 결정한 것은 딴생각 하지 않고 파고드는 스타일이 그였다. 그가 한결같이 파고든 것은 야구였다.

○ 중독자

저녁을 먹은 뒤 8시가 되면 방망이를 들고 서울 성북구 돈암동 집에서 삼선동 학교(경동고)까지 뛰었다. 학교 건물 현관에 걸린 대형 전신거울에 자신의 스윙 모습을 비춰 보면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인천아, 공부나 해라. 야구가 뭐냐”고 핀잔을 주는 선생님이 숙직을 할 때는 교사(校舍) 뒤편 현충탑 근처에서 연습을 했다. 보통 1시간 정도 스윙 훈련을 했지만, 어떨 때는 ‘통금(자정)까지 얼마나 휘두르나 해보자’고 1500번을 휘두르기도 했다.

“뭔가를 좋아하면 미치게 되고 나중에는 중독이 되지요. 나는 야구의 중독자였어요.”

그렇게 마치고 돌아오면 집 뒤 언덕에서, 가로등이 없던 시절, 달빛을 받으며 또 스윙을 했다. 속으로는 ‘네가 비춰 줘서 고맙다’고 달에게 이야기를 건넸다. 1962년 2월 21일, 일본으로 떠나기 전날 밤에도 방망이를 휘두르며 달과 상상의 대화를 했다. ‘그동안 네가 있어서 연습했는데 일본에 가면 볼 수 있나 모르겠다.’ “달이 이렇게 답을 해줬다고. ‘나는 일본 가도 있어. 내가 널 비춰 줄 테니 열심히 해.’ 물론 내 생각이었지만.”

그가 일본에서 성공할 수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않았다. 한일수교 전이고 배일(排日)감정이 컸던 때여서 ‘돈에 팔려 가는구나’, ‘매국노’라고 비난하는 편지가 쇄도했다. 어린놈이 자기 실력을 착각하는 건 아니냐는 이야기도 많았다.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열에 일곱은 1년도 안 돼 쫓겨 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극소수 야구 관계자는 “3년 안에 1군 선수가 될 것”이라고 했다.

“그 말을 아주 순진하게 받아들였어요. ‘3년이 걸린다? 그럼 다른 선수보다 세 배를 더 노력하면

1년 만에라도 1군에 갈 수 있겠구나’ 한 거죠.”

오전 오후 공식 연습을 마치고 밤에도 개인연습을 했다. 비가 오는 날에도 2군 합숙소 앞 작은 공터에서 비를 맞으며 배팅 훈련을 했다. 일본인 선배들도 “참 대단한 놈”이라고 자기들끼리 수군거렸다. 낯설고 물 선 곳에서 말도 잘 안 통하는 그가 의지할 데는 달밖에 없었다. ‘정말 이렇게 매일 연습하는데 (1군 선수가) 될 수 있는 걸까?’ ‘충분히 될 수 있으니까 염려하지 마. 그 대신 끝까지 가야 한다. 포기하면 안 돼.’ 당시 일기장에 그는 “최대한 미쳐보자. 야구만 해보자. 안 되면 한국에 돌아가지 않고 어디선가 죽어버리겠다”고도 썼다.

그렇게 하기를 1년 반. 백인천은 1963년 6월 26일 꿈에 그리던 1군 무대에 섰다. 그리고 1981년 11월 일본 야구를 은퇴하기까지 한순간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 프로페셔널

그는 일본에서 20년, 한국에 돌아와서 20년을 야구와 함께 뒹굴었다. 일본에서 받은 설움은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힘든 순간이 분명히 있었지만 야구에 미쳐서 지나고 나니 그저 그뿐이었다고 했다. 한국에서도 영욕(榮辱)이 교차했다. 한국 프로야구 초유의 4할 타자였지만 감독으로서는 만족스럽지 않았다. 자신이 야구 중독자가 되는 건 가능했지만 선수 하나하나를 중독자로 만드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는 “야구를 어떻게 끝내야 하는지를 몰랐다”고 했다.

1997년 뇌경색이 와서 쓰러진 뒤 몸 왼쪽을 쓰지 못했다. 휠체어에서 몸을 일으켜 걸음을 떼면 1∼2m도 채 못 가서 넘어졌다. 그래도 걸었다. 야구의 프로페셔널이 아니라 건강에 대한 프로가 되자고 마음먹었다. 중풍에 대한 지식을 쌓았고, 병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여기저기 찾아다니며 듣는 노력을 했다. 그리고 다양한 치료법을 경험했다. 이제는 칠순이 무색한 건강을 되찾았다. “전문지식, 노력, 그리고 경험. 이 세 가지가 프로의 조건입니다.”

1963∼1981년 일본프로야구 1군에서 1969경기 출장. 타수 6579. 안타 1831. 홈런 209. 도루 212. 통산타율 0.279. 수위타자 1회. 올스타 4회. 광복 이후 한국 최초로 해외에 진출한 프로야구 선수, 백인천이다.

민동용 기자 mindy@donga.com
#백인천#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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