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이슈]美도 놀란 ‘기적의 소나무’ 개발, 민둥산에 푸른 옷 입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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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2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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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 100주년 맞은 고 현신규 박사의 산림녹화 스토리

생전의 현신규 박사(왼쪽에서 나무를 만지고 있는 사람)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육종한 리기테다소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산림청 제공
생전의 현신규 박사(왼쪽에서 나무를 만지고 있는 사람)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자신이 육종한 리기테다소나무에 대해 설명하는 모습. 산림청 제공
‘솔방울 하나까지도 징발해 가던 일제 치하 35년과 뒤이어 터진 6·25전쟁은 이 나라 금수강산을 벌거숭이로 만들고 말았다.’ (‘山에 미래를 심다’, 이경준, 서울대학교출판부)

그러나 이후 한국은 제2차 세계대전 후 개발도상국 중 유일하게 산림녹화에 성공한 나라가 됐다. 우리 국민은 민둥산이 울창한 숲으로 변하는 기적을 목격했다. 그 기적을 만들어낸 사람들 한가운데 5척 단구의 임학자 향산(香山) 현신규 박사(1912∼1986)가 있었다.

○ 헐벗은 조국 산천에 눈물 흘려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난 현 박사는 우리나라 산림녹화의 학문적 토대를 세운 최고 공로자로 꼽힌다. 그가 없었다면 한국의 산림녹화는 크게 늦어졌을지도 모른다. 흥미롭게도 그의 어머니가 꾼 태몽은 금잔화 꽃에서 씨를 받아두는 것이었다고 한다.

한국 최초의 임학(林學)박사인 그는 나무의 품종 개량을 위한 임목육종연구소와 우수한 나무 종자를 공급하는 채종원을 설립하고, 고 박정희 대통령에게 농림부 소속 산림부를 독립시킬 것을 건의해 산림청 탄생의 ‘산파’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후 역대 정부의 치산녹화 정책에 꾸준히 조언하고, 학문적인 지식을 제공했다.

그는 원래 일본에 유학해 철학을 전공하는 것을 꿈꿨다. 하지만 갑자기 가세가 기울어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진학해야 했다. 꿈을 접은 청년은 방황을 거듭하던 중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 우치무라 간조의 강연문(‘어떻게 천직을 찾을 것인가’)을 읽고 지금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할 것을 결심하게 된다. 이후 그는 절친했던 친구의 도움으로 일본 규슈제국대 임학과에 진학했다. 3학년 때 조선으로 떠난 실습여행에서 그는 자신의 일생을 결정할 광경을 마주친다. ‘흉물스러울 정도로 황폐한 산 앞에서 향산은 눈물을 흘려야 했다. 일본은 전국의 어느 곳을 가 보아도 숲이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다. (중략) 사할린의 원시림까지 견학한 향산에게, 조국의 산은 너무 헐벗고 메말라 있었던 것이다. 그는 가슴이 아팠다.’ (‘山에 미래를 심다’)

○ 미국 교과서에 실린 소나무숲 사진


육종학자로서 현 박사의 가장 뛰어난 업적은 우리나라 풍토와 기후에 맞는 신품종을 개발해 산림녹화를 뒷받침한 데 있다. 그는 미국인들이 ‘한국에서 온 기적의 소나무(Wonder Tree from Korea)’라고 극찬한 리기테다소나무와 현사시나무를 만들어냈다.

리기테다는 척박한 땅에서 잘 자라고 추위에 강한 개량종 소나무다. 일제강점기부터 산림녹화에 많이 쓰이던 리기다소나무보다 성장 속도가 2.5배나 빠르다. 현 박사는 미국 동북부 원산의 리기다소나무와 동남부 원산의 테다소나무를 교잡해 리기테다를 만들었다. 리기다는 추위에 강하고 척박한 모래땅에서도 잘 자라지만 줄기가 구불구불해 목재로서 가치가 떨어지고, 생장 속도가 느리다. 테다는 꼿꼿하게 빨리 자라지만 추위에 약한 것이 흠이다. 현 박사는 리기다소나무 암꽃에 봉지를 씌운 뒤 테다소나무 꽃가루를 주사기로 주입하는 방법으로 새로운 품종을 만들었다. 3만 개의 비닐봉지(미국에서 소시지 포장용으로 나온 것을 활용)가 펄럭이는 경기 오산의 소나무 숲은 봄이면 장관을 이뤘다. 미국에서 발행하는 임목육종학 교과서에는 아직도 이 사진이 실려 있다고 한다. 리기테다소나무는 1962년 미국 의회가 한국에 대한 원조 삭감을 논의할 때 한국 원조가 헛된 것이 아니란 증거로도 쓰였다고 한다.

현사시나무는 산지에서도 잘 자라는 개량 포플러다. 현 박사가 이탈리아에서 들여온 ‘이태리포플러’는 전국의 하천변과 도로변을 빠른 기간에 푸른색으로 바꿔 놓았다. 그런데 이런 개량 포플러는 수분이 많은 평지가 아니면 잘 자라지 않았다. 고심 끝에 현 박사는 도입종인 은백양과 토종 수원사시나무를 교잡해 현사시나무를 만들었다. 이 나무는 원래 ‘은수원사시나무’로 불렸으나,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현신규 박사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로 불리게 됐다.

현 박사는 국토 녹화에 대한 공헌과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생전에 문화훈장 국민장(1962년)과 국민훈장 무궁화장(1982년)을 받았다. 사후인 2003년에는 최무선 허준 김정호 등 선인들과 함께 ‘과학기술인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

며칠 전인 21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코엑스에서 현신규 박사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와 국제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돈구 산림청장 등 기관 관계자와 국내외 학자 등 300여 명이 참석해 고인의 높은 뜻과 업적을 기렸다. 현 박사의 아들인 현정오 서울대 교수(산림과학부)는 “아버지는 평생을 바쳐 산림부국이란 철학을 실천하셨다”며 “나무를 심는 것이 바로 애국이란 선친의 뜻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자료: 서울대학교출판부, 산림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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