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군더더기 없는 구순 노배우의 정갈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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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3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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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3월의 눈’
연기★★★★☆ 대본★★★★ 연출★★★★ 무대★★★☆

국립극단 제공
국립극단 제공
막이 오른다. 낡은, 그래서 더 고즈넉한 한옥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대 가운데가 대청마루. 양 옆으로는 작은 방이 하나씩 있다. 빛바랜 창호지를 바른 여닫이문이 달렸다. 마루와 마당의 경계에 시멘트 벽돌 두 개를 대고 위에 나무판을 올린 발판이 있다. 하, 이것 봐라. 마루 밑에 처박힌 저 노란색 장난감 자동차. 오른쪽 마당 한구석에 녹슨 세 발 자전거.

서울 용산구 서계동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 극장 개관작 ‘3월의 눈(雪)’(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은 이렇게 극이 시작되자마자 무대 소품들이 관객에게 말을 건다. 한때는 소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결국 관심 밖으로 사라져 버린 사물들.

이 한옥에 사는 노부부 또한 평생 살던 집에서 밀려날 처지다. 국립극단의 살아있는 역사인 백성희 씨(86)와 장민호 씨(87)가 구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노부부를 연기한다. 무대에서 부부 역만 100회 이상 맡았다는 두 배우의 연기인생과 작품이 하나로 뒤섞인다.

이순(백성희)은 툇마루에 앉아 뜨개질을 하고 장오(장민호)는 느릿느릿 소걸음으로 집에 들어온다. 장오가 평생 다녔던 동네 유일의 이발소가 만두집으로 바뀌는 바람에 이발도 못 하고 돌아선 것이다.

부부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사람들이 몰려와 마루를 뜯어낸다. 집은 이미 팔렸고, 부부는 다음 날이면 양로원으로 가야 할 처지다. 잇속이 우선인 새 주인에게 세월의 무게는 안중에도 없다. 다음 날이면 집은 완전히 분해돼 어느 부잣집 거실 탁자가 되고 장식장이 될 운명이다.

집의 최후를 보고 싶지 않은 장 씨는 새벽같이 일어나 짐을 꾸려 길을 나선다. 3월인데 하늘에선 눈발이 흩날린다. 장 씨가 아내를 향해 독백처럼 말한다. “그래두 이 집이 나보단 낫군. 흩어질 땐 흩어지더라두, 뭐가 되든 된다네…. 책상두 되고, 밥상두 되고, 허허. 섭섭헐 것두 없구, 억울헐 것두 없어. 빈손으루 혼자 내려와서 자네두 만나구, 손주, 증손주까지 보았으니, 이만하면 괜찮지. 괜찮구 말구. 이젠 집을 비워 줄 때가 된 거야, 내주고 갈 때가 온 거지.”

하, 우리 인생이 그렇구나. 흩날리는 동안 잠깐 찬란하지만 땅에 닿으면 순식간에 녹아 사라지는 3월의 눈 같은 것이구나. 늙었다고, 낡았다고, 느리다고 괄시할 게 아니구나. 우리 또한 곧 그렇게 될 처지구나.

구순이 가까운 두 배우가 팔십 분간 펼치는 연기는 군더더기 없이 정갈했다. 발성은 빈틈없이 정확하고 또렷했다. 육순만 넘겨도 대사를 까먹거나 타이밍을 놓치는 일부 후배 배우들에게 일갈하는 듯했다. “우리는 배우다.”

김성규 기자 kimsk@donga.com

:i:청소년 2만 원, 일반 3만 원. 20일까지. 02-3279-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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