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럭셔리 만년필의 대명사인 ‘몬테그라파’의 2006년 한정판인 ‘소피아’ 펜. 이집트 나일 계곡의 길이인 1200km에서 따와 1200개 한정 생산한 이 만년필은 국내에서 400만 원대에 팔린다. ‘남자의 로망’의 방점인 셈이다. 사진 제공 몬테그라파
《조개껍데기 모양의 상자 속에는 만년필이 들어 있었다. 표면의 은 세공 장식이 숨을 멎게 할 정도로 정교했다. 만년필의 몸통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사랑과 미(美)와 풍요의 여신 ‘아프로디테’, 뚜껑 부분엔 사과꽃이 화려하게 새겨 있었다. 이때 깨달았다. 장인정신이 깃든 만년필은 단순한 필기구가 아니라고. 과거 수도사들이 온갖 장식을 붙여 양피지를 만들고 필사를 하는 지적 호사를 누렸듯, 현대의 만년필은 미학이 집결한 럭셔리의 진수라고. 이 만년필을 만난 건 18일(현지 시간) 이탈리아 북부 베네토 주의 바사노델그라파에 있는 ‘몬테그라파’ 회사에서였다. 1912년 이탈리아 최초의 펜 제조회사로 설립돼 한 세기의 역사를 지닌 이 회사는 설립 당시의 건물에서 40여 명의 장인들이 만년필을 만들고 있었다.》 ○ 자연과 인간이 빚은 예술품
몬테그라파 장인들이 만년필 부품을 만드는 모습과 만년필 소재인 셀룰로이드. 바사노델그라파=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베네치아에서부터 1시간 반 정도 차를 타고 들어선 바사노델그라파는 천혜의 땅이었다. SBS 드라마 ‘아테나’의 촬영지이기도 했던 바사노델그라파는 11세기에 건설된 대성당, 13세기 초 나무로 지붕을 씌운 베키오 다리 등이 어우러져 그림 같았다. 그라파 산과 브렌타 강이 교차하는 이곳엔 일찌감치 금세공과 직물 산업이 발달했다. 18세기 말부터 포도껍질을 증류해 제조한 술은 마을 이름을 따 ‘그라파’가 됐다. 중세시대 건물, 앤티크 가게, 그라파 카페 등이 조화된 정취가 예술적 ‘아우라’를 뿜어냈다.
‘몬테그라파’ 문패가 달린 노란색 건물에 들어서자 잔프랑코 아퀼라 ‘몬테그라파’ 회장(58)이 반갑게 환영 인사를 건넸다. 그는 1982년 이 회사를 인수해 키운 뒤 2000년 ‘카르티에’ 등을 거느린 세계적 럭셔리 그룹인 리치몬트그룹에 팔았다. 하지만 2009년 6월 몬테그라파는 리치몬트그룹을 떠나 다시 아퀼라 가문의 품 안에 되돌아왔다. 아퀼라 회장은 “정작 회사를 팔고 나니 마음속에 내내 미련과 아쉬움이 남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제 그는 아들 쥐세페 아퀼라 씨와 함께 몬테그라파의 화려한 명성을 새롭게 세공하고 있다. 사무실 창문을 통해서는 멀리 그라파 산(몬테그라파)이 보였다.
몬테그라파 만년필은 국내에서는 지난해부터 뒤늦게 판매가 시작됐지만 세계적으로는 ‘몽블랑’, ‘워터맨’, ‘파커’ 만큼이나 유명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몬테그라파 공장 너머 군인 병원에서 운전병으로 일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이 만년필로 글을 썼다. 소설 ‘연금술사’의 브라질 작가 파울루 코엘류는 몬테그라파의 브랜드 홍보대사를 자처해 활동하고 있다.
현재 몬테그라파는 최대 주주인 아퀼라 회장 이외에 이탈리아 유명 자동차 경주자이자 프랑스 론 지역의 와인 메이커인 장 알레지, 배우이며 영화감독인 실베스타 스탤론 등이 주주 겸 이사회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
○ 장인정신이 깃든 만년필
몬테그라파 장인들이 만년필 부품을 만드는 모습과 만년필 소재인 셀룰로이드. 바사노델그라파=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2000년 러시아 보리스 옐친이 블라디미르 푸친에게 대통령 자리와 함께 넘겨주면서 권력 이양을 상징했던 만년필은 몬테그라파의 한정판인 ‘드래건 펜’이었다. 붉은 루비로 눈을 단 용이 18K 금으로 화려하게 장식돼 있는 만년필이었다.
회사 설립 80주년인 1982년부터 한정판 제품을 만들기 시작한 몬테그라파는 럭셔리 만년필 시장의 최강자로 굳건히 자리매김했다. 각 만년필 뚜껑에는 한정 제작 개수와 일련번호가 새겨져 있다.
이날 아퀼라 회장과 둘러본 생산라인에서는 목화 섬유로부터 추출된 셀룰로이드 소재가 막대 형태로 여럿 눈에 띄었다. 천연수지보다 가격이 세 배나 비싼데도 셀룰로이드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을까. 아퀼라 회장은 “고급 소재의 힘이 뒷받침돼야 오랜 세월을 거쳐도 럭셔리로 인정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외부에 따로 마련된 창고에서는 이 셀룰로이드가 42도에서 건조되고 있었다. 수분 함량을 2% 이내로 줄여 견고한 제품력과 기분 좋은 감촉을 만들기 위해 무려 18개월 동안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최고의 품질을 얻기 위해 인내하고 숙성하는 과정이 와인 제조와 흡사했다. 몬테그라파 만년필 중 은은하고 우아한 빛깔이 나는 제품들은 이 셀룰로이드 안에 진주 조개분말을 넣은 것이다.
이렇게 형태를 잡은 셀룰로이드에 세공을 한 뒤 닦아내 수십 개의 부속을 조합하면 하나의 만년필이 완성된다. 앤티크 기법과 섬세한 디테일 가공은 이탈리아 장인 정신의 진수다. 깊이에 변화를 준 미세한 칼집들, 금속을 적은 양으로 벗겨내는 조각 기술로 표현되는 3차원 이미지에선 빛이 반사돼 나왔다. ‘연금술’이란 단어야말로 이럴 때 써야할 듯했다.
○ 도전은 계속된다
파울루 코엘류 한정판몬테그라파 사옥 1층에는 중국 무술인 겸 영화배우였던 리샤오룽(李小龍·미국명 브루스리)의 사진이 입간판 형태로 설치돼 있었다. 생전 브루스 리를 너무나 좋아했다는 아퀼라 회장이 지난해 브루스 리 탄생 70주년을 맞아 ‘브루스 리 몬테그라파 한정판’을 만들었던 것이다. 이 만년필은 은세공 장식은 350유로(약 53만2000원), 금세공과 다이아몬드 장식은 2만 유로(약 3040만 원)에 팔렸다. 2008년 코엘류의 순례 여정을 만년필에 그려 넣은 ‘파울루 코엘류 한정판’은 1200유로(약 182만 원)였다.
아퀼라 회장은 “러시아, 미국, 두바이에 이어 중국도 ‘큰손’ 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면서 “18K 금 펜촉에 주문자가 원하는 초상, 심벌, 문장 등을 새기는 ‘메이드 투 오더’ 서비스에 대한 수요도 늘고 있다”고 말했다.
디지털 시대에 펜촉의 무게를 느끼며, 펜촉에 새겨진 정교한 그림을 음미하며 펜글씨를 쓰는 사람들, 만년필이 담고 있는 지적 유희를 박물관 전시품처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 그들이 있어 만년필은 2000년대 중반부터 시계의 뒤를 이어 ‘정교한 럭셔리’로 떠오르는 중이다. 이 회사 주주 중 한 명인 장 알레지 씨가 생산하는 ‘클로 드 레르미타주 2005년’ 와인과 인근 피자집에서 배달한 이탈리아 피자를 아퀼라 회장과 함께 집무실에서 먹었다. 이 시대 럭셔리의 조건이 뭘까 물었더니 그가 말했다. “제품력, 장인정신, 사람과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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