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스마르크라면 ‘연평도’ 어떻게 풀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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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2월 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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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 평전/강미현 지음/768쪽/3만8000원/에코리브르

《왜 오늘날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1815∼1898·사진)인가. 책의 마지막 장(章)인 ‘비스마르크-역사상(像)’에서 저자는 “천안함 사건으로 어느 때보다 한반도의 위치와 통일의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며 “독일인과 그들의 역사 작업에 더없이 시선이 머문다”고 말한다. 현재 한반도의 위기를 헤쳐 나갈 현실적이고 냉철한 지도자의 모습을 그에게서 찾을 수 있다는 설명이다. 이 책이 인쇄기에 걸린 뒤 11월 23일 북한의 연평도 포격 도발사건이 터졌다. 강력하면서 현실감각으로 무장한 지도자상이 어느 때보다 묵직하게 다가온다.》

비스마르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친독일 성향의 인물로 교황 교체를 꾀하기도 했다. 1875년 한 매체에 실린 교황 피우스 9세와 장기를 두는 비스마르크를 풍자한 그림. 그림 제공 에코리브르
비스마르크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친독일 성향의 인물로 교황 교체를 꾀하기도 했다. 1875년 한 매체에 실린 교황 피우스 9세와 장기를 두는 비스마르크를 풍자한 그림. 그림 제공 에코리브르
1870년 7월 13일, 프로이센의 황제 빌헬름 1세에게 전보 한 통이 날아들었다. 나폴레옹 3세가 승인한 프랑스 외교장관 그라몽의 전보였다. 빌헬름 1세가 스페인 왕위에 대한 간섭을 포기할 것을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프랑스 국민의 분노를 잠재울 수 없을 것이라는 협박도 담겼다.

이를 본 프로이센의 수상 비스마르크는 문장가 아베켄에게 전보의 내용을 수정해 언론에 발표할 것을 지시했다. ‘프랑스가 프로이센 황제의 뺨을 갈기는 듯한’ 내용이 발표되자 여론은 반(反)프랑스 정서로 들끓었다. 여론을 등에 업은 비스마르크는 1870년 7월 19일 프랑스와의 전쟁에 나섰다. 당시 프랑스는 시민혁명과 앞선 문명으로 막강한 국력을 보유했지만 공국이 난립한 채 국민국가도 이루지 못했던 독일의 맹주 프로이센에 패하고 말았다. 비스마르크가 유럽 최고의 정치가로 우뚝 서는 순간이었다.

비스마르크는 흔히 ‘피도 눈물도 없는 정치가’로 불린다. 독일 통일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런 그에 대해 ‘독일제국의 통일을 이룬 영웅’이란 평가와 ‘민주주의에 역행하고 전쟁과 피에 의존한 독재자’라는 평가가 엇갈린다.

비스마르크를 20여 년간 연구해온 저자는 이런 양극단의 평가를 거부한다. 서문에서 저자는 “(그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복잡하고 역동적이었던 유럽의 근대적인 흐름과 통일 전후 (독일)제국의 특수한 정황에 대한 인식과 이해 없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말한다. 또 독일 통일 과정에서 그가 보인 냉철하고 흔들리지 않는 정치가로서의 자질을 높이 평가한다.

비스마르크의 현실적 정치 감각은 출생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그의 아버지는 정식 작위가 없는 지방 토호였고 어머니는 관료집안 출신이었다. 보수적 성향은 군인인 아버지에게서, 냉철한 합리성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사진 제공 에코리브르
사진 제공 에코리브르
그는 1847년 연합의회 의원으로 선출돼 정계에 입문했다. 1859∼1862년 러시아 대사, 프랑스 대사를 지내며 중앙정치에서 멀어지는 듯했다. 1862년 빌헬름 1세는 왕위에 오르자 민주화를 요구하는 의회를 견제하기 위해 보수파의 대표인 비스마르크를 총리에 임명했다. 임명 직후 그는 의회에 출석해 “시대에 중요한 문제들은 연설이나 다수결에 의한 것이 아닌 철과 피로써만 결정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그의 이 발언은 자유주의, 사회주의 세력의 엄청난 반발을 가져왔다. 남부 독일의 자유주의자들은 “난장판을 만들고 있는 융커(독일 귀족을 격하해 부르는 말)”라고 비난했다. 그의 입지는 결코 견고하지 않았다.

그는 안과 밖의 과제, 즉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독일제국 건설을 향해 흔들림 없이 달려갔다. 보수주의자였지만 보통선거제와 직접선거제를 주장했고 노동자 건강보험 등 사회보장제도를 도입했다. 독일은 다른 국가들보다 앞서 사회복지국가의 길로 들어섰다. 이는 사회주의, 자유주의 세력에 맞서 노동자 계급을 국가 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최대 업적은 독일 통일의 완성이었다. 덴마크,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그는 유럽 대륙의 맹주 프랑스까지 꺾으며 연방의 국가들을 민족주의 아래 단결시켜 1871년 독일 통일을 완성했다. 당시 독일제국의 통일 방식으로는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한 비스마르크식 소(小)독일주의 민족국가론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대(大)독일주의가 맞섰다. 오스트리아는 1815년 빈 체제 아래서 독일연방을 주도해온 의장국으로서 영향력이 막강했지만 통일을 주도할 힘이 부족했다. 다민족 국가였던 오스트리아는 범게르만주의에 의한 통일로 3000만 명에 이르는 비(非)독일인을 포기할 수 없었다. 또 프로이센의 자유주의자들 역시 통일을 외치기는 하되 역사를 주도할 능력은 없었다. 결국 하나의 목표를 지향한 비스마르크의 ‘위로부터의 혁명’이 통일 독일을 가져왔다. 저자는 “독일 통일은 (비스마르크가) 갖은 술책과 기교를 부린 결실이기도 했지만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할 인내와 노력의 대가인 것만은 분명하다”고 분석한다.

통일 이후 그의 능력은 탁월한 외교술에서 빛을 발했다. 군비 경쟁 대신 평화를 추구하며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맺고, 러시아와는 오스트리아와 함께 3제(帝)협상을 맺었다.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페인과는 지중해협정을 수립해 촘촘한 외교적 그물망을 구축했다. 신생제국의 역량이 아직 부족한 상황에서 현명한 선택이었다.

저자는 비스마르크에 대해 “(그는) 정치 전반에서 탁월하고도 신중하며 주도력까지 갖췄다”며 “그에게는 정책을 밀고나가기 전까지 가능한 한 모든 상황을 연결하여 저울질하는 습성이 있었다. 그렇기에 일단 실행에 옮긴 이후로는 어떠한 상황에도 좀처럼 굴하지 않고 밀고 나갔다”고 평가한다.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도 점검해보아야 할 덕목이다. 위대한 실천가이자 현실주의자였던 비스마르크가 빌헬름 1세 사후 새 황제의 뜻으로 1890년 퇴임한 뒤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주도국이자 최종 패자(敗者)라는 암울한 운명으로 달음질치기 시작했다.

민병선 기자 bluedot@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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