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end]혀끝 감도는 충만한 햇살… 하늘이 허락한 보르도 2009 빈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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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보르도 와인 시음회를 가다

완성 전 단계인데도 맛-향 뛰어나
전문가들 “최고품질 중 하나” 극찬



《프 랑스 보르도 지역에서는 매년 3월 마지막 한 주 동안 보르도 그랑크뤼협회(UGCB) 주관으로 특별한 와인 시음 행사가 열린다. 와인 저널리스트들을 위한 시음회인 앙프리뫼르(en primeur·배럴 와인 시음회)다. 각 나라에서 매년 100여 명이 참여한다. 올해는 특히 보르도 와인의 빈티지가 좋다는 소문이 돌아 200여 명이 신청을 했지만 협회가 수용할 수 있는 능력이 최대 120명 정도라 많은 인원이 참가하지 못했다. 올해의 보르도 현지 반응은 2000년대 최고 빈티지로 꼽히는 2005년 때보다 더 뜨거운 것이었다. 보르도 와인 2009년 빈티지는 어떤 결과였기에 이 같은 주목을 받는 것일까? 필자는 약간 들뜬 기분으로 지난달 보르도 공항에 도착했다. 보르도 와인 2009년 빈티지는 어떤 맛일까. 하늘에는 포도주 빛 저녁노을이 서서히 물들고 있었다.》

앙프리뫼르에서 와인 시음은 어떻게?


보르도 그랑크뤼협회에는 130여 개 샤토(양조장)가 등록돼 있다. 보르도 지역에서 생산되는 와인들은 포도밭 지역에 따라 각기 다른 원산지 표기 명칭(AOC)을 갖게 된다. 그래서 시음을 할 때 같은 지역이나 이웃 지역을 한꺼번에 묶어 시음 와인을 모아준다. 좀 더 편하게 시음할 수 있고 비교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크게 보르도의 다섯 지역 와인을 시음한다. 지역별로는 스위트 와인을 생산하는 소테른과 바르사크 지역, 레드 와인과 화이트 와인을 함께 생산하는 그라브와 페사크레오냥 지역, 그리고 보르도를 거처 대서양으로 흐르는 지롱드 강 우안인 생테밀리옹과 포므롤 등이다. 좌안인 메도크 지역은 큰 규모 때문에 위아래 두 지역으로 나누어 시음한다. 좀 더 부드러운 와인을 생산하는 아래 지역에는 마고와 물리, 리스트라크 지역이, 좀 더 먼 곳은 생쥘리앵, 포이야크, 생테스테프 지역이 포함된다.

각 지역에서는 보통 30개 정도의 와인들이 시음용으로 등장하는데 모두 2009년 말 수확해 양조한 ‘미완성’ 와인들이다. 시음할 샘플들은 전날 오크통에서 병으로 옮겨 놓는다.

시음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각 지역의 와인들을 맛보면서 그 와인이 갖고 있는 2009년도의 일반적 특성과 각 샤토 간의 차이를 감별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오래전에 병에 담겨져 ‘완성된’ 와인들을 마시며 비교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미완성 단계에서 완성되었을 때 맛의 품질을 예측할 수 있는 경험이 필요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시음하는 사람들이 지금 예측한 내용은 2년 뒤 실제로 와인이 병에 담겨질 때와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어떻게 결과를 예상했느냐에 따라 와인 칼럼니스트로서의 명성과 불명예가 갈린다. 현재 와인 시장에서 최고의 영향력을 갖고 있는 로버트 파커를 세계적인 비평가로 우뚝 서게 한 계기는 1982년산 보르도 와인에 대한 그의 정확한 예측 때문이었다. 이 와인을 극찬한 파커의 충고를 따라 와인을 구입한 상인들은 결국 많은 이문을 남겼다.

와인 전문가들은 이 시음회에서 맛본 결과를 그들의 웹 사이트나 신문, 잡지에 올리고, 와이너리 오너들은 이를 참조해 선물(future) 시장의 가격을 정하게 된다. 그러니 이 행사는 보르도 와인을 앉아서 널리 홍보하고, 그 결과를 세계인과 나누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주와 비교하면 참 부러운 점이다.

샤토 디켐과 슈발 블랑 2009년 빈티지의 매력

오너들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피었다. 좋은 빈티지에는 항상 좋은 토양과 완벽한 날씨가 뒷받침된다. 그래서 보르도 사람들은 “와인은 하늘이 내려준다”는 말을 많이 한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양조학이 발달하고 기후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돼 사람의 역할 비중도 조금씩 늘고 있다. 이 때문에 2000년 이후부터는 어느 정도 와인 품질을 유지시킬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행사의 참석자들은 “2009년은 최고의 품질 중 하나”라고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다만 1999, 2001, 2005년 등 각기 다른 빈티지의 특성들이 2009년 빈티지에는 모두 내재한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평가다.

시음 결과는 우선 스위트 와인은 2005년에 비해 복잡성과 균형감이 좋았다. 신선한 맛이 있어 달지만 무겁게 느껴지지 않았다. 특히 최고의 스위트 와인인 샤토 디켐은 지난 10년 동안 마셔 본 것 중 최고의 맛을 보여 주었다. 화이트 와인은 다소 조밀함이 부족하긴 했지만 전체적인 균형과 산미가 잘 받쳐주고 있었다.

보르도 레드 와인을 구성하는 포도 품종은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다. 이들 포도가 최적으로 익는 데 걸리는 시간 차가 몇 주 있어 보통 수확기 한 달 동안 햇볕이 좋아야 그해 마지막 풍작을 기원할 수 있다. 그런데 2009년도엔 바로 충만한 햇볕을 마지막까지 받아 두 품종이 충분히 익은 상태에서 수확할 수 있었다. 포도 수확 시기에 오너들과 와인 메이커들은 춤도 추고 노래도 불렀을 만하다.

이렇게 수확된 포도들로 만든 와인은 메도크 지방의 아래쪽(마고와 물리 등)의 경우 전체적으로 샤토마다 균일한 품질을 보여주었다. 물론 그들 중에는 너무 전통적인 방법과 진한 와인에 집착해 균형을 잃어버린 샤토들도 있었다. 메도크 위 지역은 일반인에게 잘 알려진 라투르, 무통 로칠드, 라피트 로칠드 같은 최고급 와인이 있는 곳이다. 이들의 2009년 결과는 결코 실망스럽지 않았다. 샤토 라투르 와인은 지금 미완성 상태에서도 마실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균형을 보여주었다.

생테밀리옹과 포므롤 지역도 부드럽게 시음할 수 있을 정도로 매력적인 맛이었다. 이 지역 최고 와인 중 하나인 슈발 블랑은 필자가 여태껏 시음한 최고의 슈발 블랑 빈티지였다.

가격을 고민하는 보르도 빈티지, 2009년

이번 빈티지가 좋은 평가를 받은 이유는 다른 빈티지에 비해 좀 더 농축되고 부드러운 타닌을 가졌으며 산미가 좋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좋은 조건에도 샤토마다 품질의 차이는 있게 마련이다. 예년보다 좋은 빈티지인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덜 유명한 샤토도 와인을 판매하기가 수월하게 됐다. 하지만 세계적 불황이 아직 끝나질 않아 와인 가격을 쉽게 올릴 수는 없을 것으로 보인다.

와인은 살아 있다고들 한다. 그래서 그 결과는 오래 두고 봐야 안다. 장거리를 달리는 사람처럼 출발선 성적이 얼마나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을지는 좀 더 봐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마치 성장하는 아이들처럼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보르도 와인에는 있다.

글·사진 보르도=김혁 와인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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